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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도'에 갇힌 4689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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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공지영, 배재흥, 신현정, 고건, 김동한 

영상 : 김동현 | 그래픽 : 박성현, 성옥희

​편집 : 박주우, 연주훈, 김금아

Part3. 기억을 듣다

섬 안에 숨어있던 선감학원의 이야기가 세상 밖에 나온 것은 목격자의 용기 덕이다. 선감학원 부원장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선감도에 왔던 일본인 이하라 히로미츠가 눈감아야 했던 유년의 기억을 끄집어낸 덕분에 일제 당시, 억울했던 선감 소년들의 삶이 세상에 알려졌다.

 

그러나 그의 용기가 무색하게, 그것이 끝이었다. 광복을 맞고 대한민국, 그리고 경기도가 선감학원을 운영하는 30여년 간 소년들의 삶은 그 이전과 변한 것이 없었다. 운영의 주체만 달라졌을 뿐, 소년들은 계속 부랑아가 돼야 했고 노예와 다름없이 살아야 했었다. 그럼에도 우리가 선감학원을 기억하는 건 일제시대의 소년이다.

"아이들이 죽는다" 오늘도 뼈 아픈 60년전 고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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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사 최초로 선감학원 비리를 폭로한 1956년 8월31일자 경인일보 사회면 기사. /이창식 전 국장 제공

"탈출하려다 바다에 뛰어들어…"
1956년 공익제보에 '참상' 기사화

"선감도를 탈출하려는 아이들이 바다에 뛰어들어 죽고 있습니다."

1956년 여름, 당시 윤상철 경인일보(본보와 다른 언론사로 1962년 폐간됨) 기자에게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경기도가 운영하는 아동복지시설인 '선감학원'에서 원생들에게 예산을 제대로 쓰지 않는다는 '공익 제보'였다. 윤 기자는 당시 편집부 기자였던 이창식 기자와 선감도로 향했다.

낯선 이들이 나타나자, 선감학원은 경계 태세에 들어갔다. 원생을 만나고 싶다는 기자에 "수업 중이다", "수련 중이다"로 일관하며 막아섰고, 예산 집행 문제를 물어도 "애들한테 먹일 것 먹이고 줄 거 주고 입힐 거 다 입혔다"는 답변만 반복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원생 한 명과 마주쳤다. 당시를 떠올리며 이창식 기자(현 경인일보 전 편집국장)는 고개를 저었다.

"그때가 8월 한여름이었는데, 아이들 옷이 여간 남루한 게 아니야. 13~18세이면 한창 영양을 보충해줘야 하는데, 삐쩍 마르고 새까맣더라고. 때가 낀 것이 제대로 먹지 못한 것 같았고…." 보이는 모습만 봐도 아이들이 제대로 돌봄을 받지 못한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원생들의 생활관도 볼 수 있었는데, 흡사 군대 내무반과 같은 모습이었다. 침상 위에 놓인 국방색 모포를 들추니, 곳곳에 구멍이 숭숭 뚫려 있었다. "원생들이 생활하는 건물이었는데, 양쪽에 침상이 있고 모포만 위에 놓여 있더라고. 깔끔하지도 않았어요. 우중충하고 전기가 들어오는지도 모를 만큼 어두웠어요."

그렇게 1956년 8월 31일 '기아에 떠는 원생' 제목의 기사가 보도됐다. 육지와 떨어진 섬에 숨어있던 소년들의 비극이 처음으로 세상과 마주한 순간이었다.

두 기자는 추가 취재를 시도했지만 결국 하지 못했다. 보도 이후 경찰서에 불려가야 했고 선감학원은 더 폐쇄적으로 변했다. 새로운 사실이 더 나오지 못했고, 그렇게 선감학원 취재는 끝이 났다.

수십 년간 달라진 건 없었다

'무관심이 키운 비극'

이미 60여년 전 수면 위로 올라온 진실이었다. 우리는 알고 있었다.

가까운 서쪽 바다 선감도라는 섬, 그 곳에 영문도 모른 채 끌려온 어린 소년들이 살고 있다는 사실.

그 곳에서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배우지도 못한 채 하루 10시간씩

어른도 감당키 어려운 노역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알고 있는 것을 눈감았다면, 그건 무관심이다.

무관심이 부른 비극은 6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1956년 세상에 처음 드러난 선감학원 운영 실태

'기아에 떠는 원생…희열보다 비애가 커지는 아방궁'

(1956년 8월 31일 경인일보)

1956년 8월 28일 현재 174명의 부랑아를 수용하고 있는 선감학원의 운영 실태는 입에 담기 어려울 뿐 아니라, 육지와 동떨어진 도서라는 점 때문에 부정 적발이 쉽지 않았다. (중략) 원생들은 헐벗고 배곯고 교육보다는 강제 노역에 혹사 당했다. 일부 원생들은 뭍으로 탈출하려고 바다에 뛰어들었다가 익사한 참사도 여러 차례 있었다고 했다. (중략) 우선 의아의 초점은 막대한 예산 가운데 학원 운영비로 744만1천700환, 사무비로 425만4천300환이 지출된 점이 이해하기 어렵다. (중략) 원아의 옷차림이 초라한 것은 고사하고 학원 사무실과 직원 화장실은 호화찬란해서 원생들의 생활관과 조화롭지 못했다. 운영비 744만환으로 마련한 급식은 '꽁보리밥'에 '호박죽' 그나마도 때에 따라서는 '간장'이 전부였다. 상주 직원이 14명, 섬 안에 함께 사는 가족까지 합치면 100명이 넘었다. 이는 가족을 위한 선감학원이라고 비난해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드러난 사실들,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기사에는 상세히 쓰지 못했지만 직원 화장실을 두고 이 기자는 "호화찬란했다"고 떠올렸다. 지금 생각해도 기막힐 노릇이라고 했다.

"56년 엔 일반 가정도 모두 푸세식 화장실을 쓸 때에요. 최고급 호텔이나 가야 서양식 양변기가 있었지. 원생들 화장실은 푸세식인데, 직원들 화장실엔 양변기가 있었고 아주 호화찬란했지. 너무 차이가 나서 씁쓸했지."

강제노역, 탈출과정의 익사, 열악한 의식주. 선감학원의 총제적 문제들이 두 기자의 용기있는 보도로 어렵사리 세상 밖에 나왔지만 달라진 것은 없었다.

그로부터 6년이 지난 1961년, 이 기자는 다시 한 번 선감학원을 취재할 기회가 있었다. 당시 관선 경기도지사였던 박창원 육군 준장을 따라 선감학원 시찰에 동행하면서다.

"나로서는 매우 궁금했지. 아이들 생활이 좀 달라졌을까 걱정도 됐고. 그때도 8월 여름이었어요. 하지만 6년 전이나 후나 똑같았어요." 박창원 준장은 도착하자마자 원생 생활관으로 직행했다.

"그때와 달리 도지사가 간다니까 정리해놓았는지 모포가 네모 반듯하게 접혀있더라고. 근데 박 준장이 모포를 지휘봉으로 딱 들었어요. 모포가 쫙 펴졌는데, 다들 놀랐지. 구멍이 숭숭 뚫려서 너덜너덜해. 6년 전이랑 달라진 게 없는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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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챦은 부랑아로'

(1963년 7월 12일 경향신문)

길을 잃고 방황하다 불량아 단속에 적발돼 아동보호소를 전전긍긍하던 12세 소년이 그를 찾아 헤매던 부모들과 8개월 만인 11일 하오 5시 극적인 상봉 후 그리던 집으로 돌아갔다 (중략) 부모는 아이가 선감으로 이송된 것을 확인, 선감학원에서 수원 혜광원으로 이송되어 수용 중인 것을 알고 찾아온 것이다.

'자유에의 탈출…부랑아 수용소 선감학원생들'

(1964년 10월 26일 경향신문)

국가에서 운영하는 부랑소년 수용소인 소년원에 대부분의 원생이 부모나 연고자가 있고 자유 없는 생활을 벗어나기 위해 탈출하는 일이 잇달아 일어나 동심이 흐려지고 있다. (중략) 금년 들어 103명이 사방이 바다로 싸인 섬으로부터 탈출을 기도하는 등 사태까지 벌어지고 있다. 또한, 선감학원생 427명 중 3분의 2가 부모나 연고자가 있는 소년들인데 일과에 짜인 부자유스러운 생활과 먼저 들어온 원생들의 까다로운 하명상복관계와 종일하는 일에 지쳐 위험을 무릅쓰고 바닷물로 탈출을 기도하는 것이다. (중략) 선감학원장 문기성씨는 "원아들이 모두가 연고자가 있다"고 말하면서 "부자유스러운 생활 때문에 기회만 있으면 탈출하려고 갖은 수단을 쓰고 있다"고 실정을 말했다.

그 후로 이따금 선감학원의 실상을 다룬 보도들이 나오기도 했다.

경인일보 보도 이후 1963년 경향신문에는 부모가 있는 아이가 선감학원에 붙잡혀 갔다가 극적으로 상봉했다는 기사와 함께 1964년엔 선감학원이 부모가 있는 아이들도 마구잡이로 수용했다는 기사도 보도됐다.

이들 기사를 살펴보면 지금 선감학원의 실태로 고발되는 다수의 내용이 그대로 보도됐다. 1963년 기사에는 길을 잃은 아이가 선감학원에 수용됐다가 또 다른 아동보호소로 전원된 후 부모와 상봉했는데, 이를 두고 과잉단속이 부른 빗나간 아동복지라고 비판하며 부랑아가 아닌 아동을 마구잡이로 잡아간 선감학원 수용실태가 고발됐다.

1964년 기사는 선감학원 원생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탈출을 시도한다는 내용이 고스란히 담겼다. 특히 해당 기사에 등장하는 '지유성' 원생은 정확한 집 주소를 알고 있었고 부모가 있었으며 인천으로 전국체육대회를 구경 왔다 선감학원에 끌려왔다는 진술을 했다.

지유성 원생처럼 당시 전국체전에서 선감학원으로 잡혀 온 부랑아가 82명이라며 기사에는 연고지와 부모가 있는 아동 명단을 공개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후로 1982년 선감학원이 문을 닫을 때까지 특이할만한 언론보도는 나오지 않았다. 무관심 속에 원생들이 겪은 비극은 수십년 간 이어졌다. 원생들의 삶은 달라진 것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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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원 화장실 호화 찬란
지금 생각해도 기막혀

"아이들이 죽는다" 오늘도 뼈 아픈 60년전 고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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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친구는 부랑아가 아니었다

당시에도 우리는 선감학원 친구(원생)들이 부랑아가 아니란 걸 알고 있었어요. 

선감도 토박이 최병호(67)씨는 1963년 5월 선감국민학교 2학년이었던 그때,

선감학원에 수용됐던 김영배(68)씨를 처음 만났다.

영배씨는 당시 3학년으로, 선후배 사이였지만 병호씨는 영배씨를

수업도 같이 듣고 축구도 같이 하는 '친구'로 기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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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들도 알고 있던 '선감도의 비극'

어린 시절이었던 만큼 이름보다는 별명으로 서로를 불렀는데, 그때 영배씨의 별명은 '양돼지'였다고 떠올렸다. 퉁퉁하게 생긴 모습을 보고 친구들이 붙여준 애칭이다.


영배씨는 1963년 서울 충무로에 있는 큰누나 집으로 가다 경찰에 붙잡혀 선감학원에 끌려왔다. 그런 영배씨가 부랑아가 아니었다는 건 병호씨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병호씨뿐 아니라 선감도 주민들 대부분 선감학원 원생들이 부랑아가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병호씨는 "같이 학교 다녔던 친구들은 그런 상황을 더 잘 알았다. 학교로 부모가 찾아와서 데려가는 애(원생)들도 있었다"고 회상했다.  

선감도에서 나고 자란 신윤기(76)씨도 선감학원 피해자인 김춘근(73)씨의 친구다. 춘근씨는 1959년 11살 나이에 하인천에서 아버지를 기다리다 경찰에 붙잡혀 선감학원에 보내졌다. 윤기씨는 "춘근이가 부랑아가 아니라는 건 그때도 알고 있었다"며 "나중에 춘근이 아이를 우리 아내가 봐주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들은 선감국민학교 동창이다. 교실에서 함께 공부하고 밥을 먹고 공을 차던 죽마고우다. 하지만 병호씨와 윤기씨는 가족의 보살핌을 받는 평범한 학생이었고, 영배씨와 춘근씨는 가족을 빼앗긴 선감학원 원생이었다. 그 차이가 인생을 완전히 뒤바꿔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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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선감국민학교 학생들이 탁자에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 /경기도교육정보기록원 제공

"치료 받지 못해 죽고, 탈출하다 죽어" 

친구들은 선감학원 원생이었던 친구들의 고통을 또렷하게 기억했다. 춘근씨의 친구인 윤기씨는 "국민학교 4~5학년 시절, 그때 원생들에게 깎지도 않은 통밀로 밥을 지어 먹였다. 그걸 먹으면 소화가 안 되니까 그냥 다 변으로 나왔다"고 떠올렸다.

선감학원에서의 폭력도 구체적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윤기씨는 "군대처럼 선후배 문화가 강하다 보니까 그런 폭력이 있었다. 좀 나쁜 선배들이 후배가 잘못하면 낫 뒷부분으로 등 부위를 때렸다"고 증언했다.

이들은 선감학원에 의료시설이 없어 치료를 받지 못해 죽고 탈출했다 익사한 친구(원생)들이 있었다고 떠올렸다.

병호씨는 "옛날엔 섬이었으니까 아무래도 의료 시설이 낙후돼 피부병 같이 질병으로 죽은 애들이 있었다"고 했고 윤기씨는 "부모와 형제가 보고 싶어서 탈출하려는 애들이 많았다. 여름에 어섬쪽 방면 바다로 애들이 헤엄쳐 도망치는 경우가 있었는데, 눈으로 보면 가까워도 실제 수영해보면 엄청 거리가 멀다. 그래서 바다에서 익사해서 떠내려온 애들이 많았다"며 "그렇게 탈출해도 대부도나 어섬에서 머슴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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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붙잡으면 선감학원으로"… 현장 지침에 복지는 없었다

아동복지 국가공무원이 앗아간 소년의 삶

친구들은 선감학원에서 벌어진 일들을 그때도, 지금도 모두 알고 있다. 그 섬에서 함께 자라면서 모두의 마음 속에 또렷이 남아있다. 그렇기에 영배씨의 친구인 병호씨는 7년 전, 선감18동 통장을 하면서 선감학원 진상 규명을 위해 활동했다. 그리고 30년 만에 영배씨를 다시 만났고 단번에 친구임을 알아봤다. 병호씨와 윤기씨는 선감학원 피해 진상이 반드시 규명돼야 하고, 국가가 명확하게 사과해야 하며 피해에 대한 정당한 보상이 이뤄져야 한다고 한목소리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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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일보가 정보공개 청구로 입수한 1976년 4월 고양군(현 고양시)의 '아동복리지도원 임용의 적정'관련 문서(왼쪽)와 1976년 5월 고양군(현 고양시)의 '아동복리지도원 임명에 따른 지시' 문서. 경기도가 각 시군에 아동복리지도원의 자격을 규정하고, 다시 엄격히 관리하라는 등의 내용이 담겼다.

학위·자격 따져 전문가 선발했지만
상담 등 아동 위한 행정절차는 없어

병호씨는 "최근에 선감학원 피해자들을 지원해준다고 하는데 형평성 있게 해줬으면 좋겠다. 경기도민만 해준다는데 말도 안 되는 얘기다. 선감학원 원생이었던 인천 사는 동창이 경기도로 옮기려고 알아본다더라. 이 친구들, 다 예순이 넘었고 일할 능력이 없는 사람도 많다"고 안타까워했다.

윤기씨도 마찬가지다. "최근에 발굴작업도 하면서 진상 규명 움직임을 보이는데 잘 됐으면 좋겠다. 그 사람들이 얼마나 고생을 많이 했나. 강제로 끌려와서 고생만 했는데 사과하고 보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선감학원에 끌려가는 순간부터 수십년이 지난 지금까지 피해자들은 '나는 부랑아가 아니'라고 울부짖는다. 그 울부짖음을 그들과 유년을 함께 보낸 섬의 친구들도 들었다. 모두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을 잡아간 국가도 알고 있었다. 

소년을 부랑아로 전락시킨 그 시발점엔 국가공무원이면서 아동복지전문가였던 '아동복리지도원'이 있었다.

길거리, 집 앞 골목 등에서 소년들을 잡아 단속의 명목으로 선감학원에 보낸 이들은 주로 경기도, 도내 각 시군에 배치된 아동복리지도원들이었다.

국가는 이들에 대해 아동에 대한 전문성을 요구했다. 실제로 학위 등 자격요건을 엄격하게 따져 아동복지 전문가들이 선발됐으며, 자격요건에 위배된 이들은 '해임'까지 감행할 만큼 까다롭게 관리됐다.

당시 아동복리지도원은 1970년 보건사회부령 제348호에 따르면 교사 자격증을 소지하거나 1년에 1번 진행되는 자격시험을 통과해야만 될 수 있었다.

시험은 사회사업개론과 법제대의 그리고 아동관계법령 및 실무 4과목에서 평균 60점 이상을 받아야 하고 매 과목마다 40점의 과락도 면해야 한다. 지금 시점의 사회복지사 자격시험과 비교하면 사회복지정책·법제론 등 8개 과목에서 매 과목 4할 이상, 전 과목 총점의 6할 이상을 득점해야 하는 현재와 매우 유사하다.

경쟁률도 꽤 높은 편이었다. 1971년 6월 7일에 시행된 아동복리지도원 자격시험은 500명 가까이 지원해 경쟁률 5:1을 뚫고 전국에서 총 93명의 합격자가 나왔다. 당시 경기도에선 10명이 합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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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상 나타나는 '건전 육성' 허울뿐
현실은 반대… 부랑아 단속 집중 강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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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의 자격요건도 엄격하게 관리됐다. 경인일보가 확보한 1976년 4월 고양군(현 고양시)의 '아동복리지도원 임용의 적정' 문서를 보면 "아동사업의 특수성에 비추어 아동복리지도원 임용 기준을 시달한 바 있으나, 위배한 결격자를 임용하는 사례가 없도록 유념하고, 결격자는 즉시 해임 조치할 것"이란 공문을 경기도가 전 시군에 하달했다. 이때 도는 교사자격증 미소지와 무자격으로 5명을 해임시켰다.

아울러 아동복리지도원에 대한 자격 검증은 전국에서 대대적으로 진행됐다. 1976년 5월 고양군에 발송된 문서를 살펴보면 "경상북도의 합동감사 결과 아동복리지도원 43명 중 6명이 무자격 임용돼 교체하라는 지시가 있다. 각 시군은 규정에 따라 조치한 뒤 최종임용상황을 보고할 것"이라며 재조사를 지시했다.

치열하고 엄격하게 채용된 경기도 아동복리지도원은 길거리, 기차역, 골목 등지에서 배회하는 아이들을 선감학원에 보내는 데 활용됐다. 피해자들이 이들에게 "부모(가족)가 있다" "집 주소를 알고 있다"고 아무리 호소해도 일단 붙잡고 나면 선감학원으로 보내는 게 그들의 일이었다. 
실제로 피해자들은 선감학원에 강제 수용되기 전에 상담을 받아본 적이 없다고 진술하고 있다. 당시 아동복리지도원으로 근무했던 이들의 진술 역시 마찬가지다. 부랑아 단속업무만을 집행했을 뿐 이들 본연의 목적대로 아동을 위한 제대로 된 행정절차를 이행할 수 있는 여건이 아니었다고 진술한다.

'단속 후 쫓기듯이 아이들에게 인적사항을 묻고 명단만 작성해 선감학원으로 보내라'는 지시에 따라야 했기 때문인데, 상담을 통해 아동의 상태를 살피는 등의 '아동복지'는 생각할 수 없었다.

아이러니한 건, 국가가 유독 이들의 전문성에 집착한 데는 아동복리지도원의 본래 역할인 '아동의 건전 육성'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서였다는 점이다.

실제 1976년 고양군 문서에도 "요보호아동의 보호사업을 적극 전개하고 아동의 건전 육성을 도모하기 위해 각 시군에 배치된 아동사업요원(아동복리지도원)의 자질 향상이 시급히 요구되고 있다"고 적혀 있는데, 국가는 보호가 필요한 소년들이 사회에서 잘 적응할 수 있도록 지도, 교육하기 위해선 현장에서 아동들을 대면하는 아동복리지도원의 역량이 중요하다고 판단했을 터다.  
그러나 현실은 이와 정반대였다. 국가는 아동복리지도원을 부랑아 단속에만 집중하도록 강요했다. '부랑아처럼 보인다'는 이유만으로 아동복리지도원들은 아동을 단속의 대상으로만 취급해야 했다.

김진희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연구원은 "선감학원, 형제복지원 모두 마찬가지다. 아동들이 단속했을 때 아동복리지도원들이 아동에 대한 정확한 분석을 한 후 집에 돌려보내거나 보호가 필요한 경우 임시보호시설에 보내는 등 아동복지의 조치를 취해야 했다. 하지만 경기도는 그런 분류가 없이 단속하면 바로 선감학원으로 보냈다"며 "선감학원은 서울시립임시아동보호소와 같은 아동보호소가 아니라, 부랑아수용시설이었다. 결국 전문적인 자격을 갖춘 인력을 뽑아 놓고 전문적 능력을 펼칠 수 있는 구조가 아니었고 단순한 단속업무에만 역할이 한정됐다"고 설명했다.

우리는 지난 2개월여간 이어온 선감학원 특별기획 시리즈를 통해 줄곧 '아동복리지도원으로 활동했던 이들'의 연락을 기다렸다. 그때는 용기 내지 못했지만, 지금도 그 섬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채 고통 속에 살아가는 나이 든 소년들을 위해 용기 내주길 기다렸다. 아쉽게도 우리와 소년들의 기다림에 응답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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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피해자가 아닌 부랑아로 보는걸까

'이제는 달라지겠구나' 기대했던 피해자들의 안도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김영배(68) 선감학원아동피해대책협의회 회장은 이제 "무섭다"고 말했다. 일흔을 바라보는 나이, 그가 느낀 무서움은 무엇에서 비롯됐을까. 

10년 전, 선감학원 피해자들은 친목 모임을 만들었다. 고통스러웠던 유년 시절을 성토하기 위한 만남은 아니었다. 그저 비슷한 처지에 놓였던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술을 곁들인 자리에선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선감학원 이야기를 꺼냈다. 그때마다 "어린 시절의 기억을 견딜 수 없다"는 울분이 곳곳서 터져 나왔다.

"여전히 선감학원에 수용됐던 그 시간 속에 살고있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마음이 모였고, 그렇다면 우리가 겪은 일을 '세상에 알려보자'고 의기투합 한거죠." 두려웠지만 그래야만 남은 생, 후회 없이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협의회 활동의 첫 번째 목적은 국가폭력의 피해자로서 정당한 권리를 찾는 거였어요. 피해자가 아닌 사람은 피해자의 '자격'이라는 게 어떤 의미인지 실감하기 어려울 겁니다. 피해자라는 그 자격을 얻기 위해 10년이란 시간을 쉼 없이 달려왔습니다."

김 회장은 국가폭력의 당사자인 '국가'가 피해자들에게 공식적인 사과를 내놓지 않는 것에 불안하다. 국가는 여전히 자신들을 피해자가 아닌 '부랑아'로 보고 있다는 불안이다. 국가폭력의 피해자임을 누구도 인정하지 않던 10년 전의 그때로 되돌아가는 건 아닌지, 이제는 무섭다고 토로한다.

"선감학원에서 발생한 아동 인권침해사건의 진실을 되돌아보려면 가해자인 국가의 사과가 가장 우선돼야 합니다. 선감학원을 만들어 어린아이들을 강제로 가두고 인권을 짓밟은 당사자인 국가가 피해자들의 아픔을 적극적으로 어루만져야 상처도 치유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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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 한마디 없는 국가

"무섭다."

제2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는 지난 10월20일 '선감학원 아동 인권침해사건 진실규명 결정 발표' 기자회견을 열어 선감학원에 수용됐던 원생들이 국가폭력의 피해자임을 분명히 했다. 일평생을 부랑아로 낙인찍히고, 불행한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살아온 피해자들이 그토록 바라던 결과였다.

진화위 진실규명
"과오 되돌릴 시작점"

시동도 못 건
​후속대응

김영배(68) 선감학원아동피해대책협의회 회장은 최근 제2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이하 진화위)가 내놓은 진실규명 결과를 두고 "지난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시작점"이라고 평가했다.

진화위는 이번 조사를 통해 당시 관선 체제였던 경기도를 비롯, 국가기관이 위법한 방식으로 부랑아를 단속했고, 선감도에 아동을 가둔 채 강제노역을 시키는 등 아동인권침해를 자행한 사실을 폭넓게 인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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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안부·복지부 등 이행계획 전무 "검토·고민중"

진화위는 그러면서 부랑아 대책을 수립하고 실제로 이를 집행한 기관을 구체적으로 명시하며 선감학원 피해자와 유족에게 공식적으로 사과할 것을 권고했다.

진화위는 또 국가가 특별법을 제정해 피해자들의 신체·정신적 회복을 돕고, 원생 다수의 유해가 매장돼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묘역의 봉분을 서둘러 발굴하는 등의 모두 9가지 조치를 권고했다. 

 

진화위의 권고를 받아든 국가기관들의 후속대응은 매우 굼뜨다. 진화위는 지난달 말부터 이달 초에 걸쳐 행정안전부, 보건복지부, 법무부, 교육부, 경찰청, 경기도 등 선감학원과 관련 있는 각 기관에 위와 같은 권고사항이 담긴 결정문을 보냈다.

그러나 선감학원 피해자 지원 조례를 운영 중인 경기도를 제외한 기관 대부분은 진화위의 권고사항을 받아들고도 구체적으로 어떤 조치를 이행해야 할지 계획조차 세우지 못한 상태다. 김 회장이 언급한 '시작점'에서 출발조차 하지 못한 형편이다.

이에 대해 행안부 관계자는 "어느 부처가 어떤 권고사항을 이행해야 하는지 명확하지 않은 부분이 있다"면서도 "진화위의 진실규명과 권고 내용을 검토하고, 어떤 역할을 해야 되는지 고민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무엇보다 선감학원 피해자들이 가장 신속하게 이뤄지길 바라는 진화위의 권고사항은 '국가의 사과'다. 이들은 국가의 진정 어린 사과가 선행돼야 다른 권고사항도 차질없이 진행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김동연 경기도지사가 최근 피해자와 유가족에게 사죄의 뜻을 전하긴 했지만, 정작 당시 선감학원 운영을 주도한 국가기관의 사과는 전무하다.

진화위 관계자는 "국가의 사과는 여러 가지 형태가 있을 수 있다. 가장 상징적인 건 대통령의 사과가 있을 것이고, 관련 부처의 장이 위령제 등 피해자와 유가족을 위로할 수 있는 행사에 직접 참석해 상처를 보듬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유해발굴에 속도를 내야 한다는 의견도 적지 않다. 진화위는 선감학원 희생자들이 암매장된 곳으로 추정되는 봉분 5개를 지난 9월26일부터 5일에 걸쳐 시굴했다. 이 결과 봉분 5개 전부에서 치아와 유품 등이 발견됐다. 진화위는 선감학원 원아대장에 기록된 사망자 숫자에 비해 실제 묘역 봉분의 수(140~150개 추정)가 훨씬 많다며 신속한 발굴을 권고한 바 있다.

정진각 안산지역사연구소 대표는 "사과만큼 중요한 게 (피해를 입고) 죽은 사람에 관심을 가지는 일이다. 죽은 사람은 말이 없기 때문에 자신들의 억울함을 이야기조차 할 수 없다"면서 "갑자기 사라진 아이를 평생 가슴에 묻어둔 채 살아가고 있을 부모들을 위해서라도 서둘러 유해를 발굴해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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