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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도'에 갇힌 4689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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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공지영, 배재흥, 신현정, 고건, 김동한 

영상 : 김동현 | 그래픽 : 박성현, 성옥희

​편집 : 박주우, 연주훈, 김금아

Part1. 진실을 묻다

선감학원 피해자들은 누명을 썼다. 돌아갈 집이 있고, 보호받을 부모가 있는데도 '부랑아'로 낙인찍히며 선감도란 이름의 섬에 영문도 모른 채 갇혔다. 경기도는 1982년까지 40년 동안 8~18세의 부랑아 4천689명을 지옥도라 불리는 선감학원으로 보냈다.

01

이들 중 누가 부랑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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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가정에서 자란 아이와 선감도에 수용됐던 원생의 얼굴이 섞여 있다. 누가 부랑아인지 구분할 수 있겠는가? 이 사진에서 평범한 가정에서 자란 아이는 4·5번이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및 독자 제공

'그저 그렇게 보여서'…
영문도 모른채 끌려간 아이들

위에 여러 아이의 사진이 있다. 평범한 가정에서 자란 아이와 선감도에 수용됐던 원생의 얼굴이 섞여 있다. 누가 부랑아인가. 외형만 보고선 누구도 섣불리 구분할 수 없는 게 당연하다. 그럼에도 경기도는 길가에서 쓰레기를 줍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방식으로 길거리 아이들을 무작위로 수집했다. 근거는 허무할 정도로 빈약했다. 그저 부랑아처럼 보여서.

이곳에 수용된 원생들은 자신의 처지를 납득할 수 없었다. 집과 부모가 그리웠을 테고, 폭력과 강제노역으로 얼룩진 선감학원 시설에 쉬이 적응하지 못했다. 원생 일부는 목숨을 걸고 바다를 헤엄쳐 섬 밖으로 빠져나가기 위한 탈출을 감행했고, 이 과정에서 목숨을 잃는 원생들이 속출했다.

대개는 제대로 된 묏자리도 없이 아무렇게나 묻혔고, 수십년이 지난 현재에 이르러서야 망자들의 흔적을 찾기 위한 발굴작업이 이뤄지고 있다.

선감학원은 누구의 책임인가. 우리는 이미 답을 알고 있지만 가슴 깊이에 묻어왔다. 시대 탓을 했고 먹고 사는 일을 핑계댔다. 그렇게 40년이 흘렀다. 이제 명료하게 다시 묻는다. 선감학원은 누구의 잘못인가. 

02

공문서 확인결과 '허술함' 드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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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일보가 정보공개청구를 통해 입수한 1976년 5월·7월 경기도 고양군(현 고양시) 사회환경국 사회위생과 '부랑아 특별단속' 공문. 경기도지사 발신 문서로, 거리를 배회하는 부랑아들을 선감학원에 이송할 것을 경기도가 명령했다.

경기도의 무분별한 부랑아 단속

경인일보는 경기도의 부랑아 단속이 얼마만큼 허술하게 이뤄졌는지 보여줄 수 있는 당시 공문서를 확보했다. 해당 문서에는 도가 부랑아라는 존재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지 잘 드러난다.

도는 1976년 7월6일부터 8일까지 사흘간 시군 전 지역을 대상으로 부랑아 단속에 나섰다. 이에 앞서 도는 각 시군에 '부랑아 단속'이란 제목의 공문을 보냈다. 부랑아 단속의 목적은 다음과 같다.

"도시 환경 정화사업의 일환으로 실시하고 있는 부랑아 및 비행소년 선도 사업을 추진하여 많은 성과를 거양한 바 있으나 아직도 거리를 배회하거나 걸식하는 아동이 근절되지 않고 있어 다음과 같이 지시하니 자체 계획을 보강하여 단속 및 선도에 철저를 기하도록 할 것."

당시 도가 부랑아를 대대적으로 붙잡아 들인 이유는 다름 아닌 도시 미관을 위해서였다. 집이 없는 아이를 보호하거나, 가출한 소년을 무사히 집으로 돌려보내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도의 시각에서 부랑아는 그저 도시를 더럽히는 존재였을 뿐이다.

도시 미관 이유로 대대적 '청소'
'껌팔이·구두닦이' 잣대 자의적

도는 부랑아 단속을 1년 내내 실시했을뿐 아니라,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소에서는 '특별 단속'까지 벌이며 길거리 청소에 열을 올렸다. 실제로 도는 1976년 5월4일부터 19일간 '유원지 및 관광지 일원'에서 부랑아 특별 단속을 진행했다. 이 때 각 지역에서 붙잡힌 부랑아들은 월 2회 도로 인계돼 '선감학원'으로 이송됐다.

단속 대상은 '부랑아 껌팔이 구두닦이 및 거리요보호아동'이었다. 부랑아를 단속하는 공무원들은 그러나 부랑아를 판단하는 기준을 정확히 알지 못했다. 단속을 지시하는 공문에 적혀 있지 않았고, 무엇보다 아동복리법이나 동법 시행령 또는 시행규칙도 부랑아에 대한 명확한 정의를 명시하지 않았다.

이는 부랑아를 수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경기도 선감학원 조례' 역시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도는 껌팔이나 구두닦이 등 가정의 생계를 위해 길거리에서 돈을 벌던 아이들 또한 부랑아로 싸잡아 단속했다. 부랑아에 대한 기준이 분명하지 않으니, 이른바 '가두직업소년'은 부적절한 부랑아 단속의 주요 타깃이 됐다.

길거리에 나가 부랑아를 직접 단속하는 직원들은 성과를 숫자로 증명해야 했다. 부랑아를 판단하는 상세 기준이 없는 상태에서도 성과를 위한 단속을 해야했고, 그 기준은 다분히 자의적이었다.

경인일보는 과거 도의 직원으로, 부랑아 단속 업무를 담당했던 실무자들의 진술을 확보했다. 부랑아로 분류되면 인신구속에 가까운 불이익이 발생하기 때문에 그 선정 방식에 신중을 기울였어야 하나, 피해자들의 고통에 상응해 결코 조심스럽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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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졸업 후 가정형편이 어려워 다음 해로 입학을 미루고 수원에서 낮에는 구두를 닦고 밤에는 극장에서 장사를 하며 홀어머니와 동생들의 가장 역할을 했다.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수원극장 앞에서 구두를 닦고 있었는데 시청직원으로 추정되는 남자가 따라오라고 하길래 따라갔더니 집에 가지 못하게 했다.

- 1973년 8월 선감학원 수용된 김모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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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랑아는 배고프다든지, 걸인 비슷하게 '나 밥 좀 주세요' 하는 애들이 부랑아인 거고 불량기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냥 풀이하면 가정이 불우해서 떠돌아다니는 아동이다. 제 판단은 집이 아니고 외부에서 잔다든지 밥을 어디로 얻어먹으러 다닌다든지 의복이 남루하다든지 이런 것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서 외모적으로 판단한다.

- 1970~80년대 경기도 부녀아동과 근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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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걸하고 뭘 자꾸 달라고 하거나

행인 주머니에 손이 들어가고 그런 애들이죠..

가게에서도 음식을 훔치고 그런 애들..

- 단속 실무자 권모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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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국가의 인권 유린

"개밥도 이렇게는…"
배곯은 아이들, 짐승처럼 강제노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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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가 존재하는 가장 큰 이유는 '자국민 보호'다. 모든 역사를 통틀어 자국민을 보호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를 때 국가는 가장 큰 위기에 봉착했다. 선감학원의 비극은 여기서 비롯된다. 일제시대에 만들어진 선감학원이 대한민국에서도 이어져 온 단 하나의 연결고리는 '부랑아'. 자국민을 보호할 국가 자체가 부재했던 일제시기와 자국민 보호의 의무를 저버린 대한민국은 '부랑아처럼 보인다'는 한가지 이유로 아동의 인권을 유린했다.

이 삐뚤어진 인식은 경기도가 선감학원을 운영하는 기저에 깊숙이 뿌리내려졌다. 먹을 것, 입을 것, 잘 것 어느 것 하나 성한 것이 없었고 고된 노역과 폭행이 만연했으며 제대로 된 교육도 없어 미래를 꿈꿀 수도 없었다. 쓰다 버리고, 없어져도 상관없다고 여겼다. 운영의 주체가 경기도지만 당시 대통령이 임명한 경기도지사가 관할한 경기도는 국가기관이었다. 결국 대한민국이 자국민인 선감학원 아동에게 그랬다.

사진은 당시 선감학원 아동들이 제공받은 급식을 재현한 모습이다. 선감학원 피해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최대한 비슷하게 재구성했다. 주식은 강냉이밥이거나 꽁보리밥이었다. 낡아빠진 양은그릇에 약 3분의1 담은 강냉이밥이나 꽁보리밥에, 건더기가 거의 없는 소금만 뿌린 국을 반찬으로 주었다. 그나마 경기도지사가 시찰을 오거나 선감학원 창립기념일 등 특별한 날에 고깃국이 나왔는데 그마저도 비계만 넣고 끓여 먹고 탈이 나는 일도 있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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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냉이랑 통밀을 제대로 갈지 않아 먹기도 힘들었어요.

국은 보통 굉장히 묽고 아무 맛도 안났는데, 모래가 섞여 있어 잘 흔들어 윗 부분만 마시는 꼴이었습니다.

개밥도 이렇게는 안 줬을 거예요.

- 1954년 14살 입소해 1959년 19살에 퇴소한 최석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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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과 반찬 양이 원체 적어서 중학생쯤 되는 큰 애들이 초등학생 정도 애들 것을 빼앗아 먹기도 했어요.

힘이 없으면 그냥 당하는 겁니다. 넉넉했으면 벌어지지 않았을 일인데, 초등학생 애들도 서네번 떠먹으면 식사가 끝날 정도로 양이 적었어요.

- 1963년 9살에 입소해 1968년 14살에 퇴소한 김영배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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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일대에 쥐, 뱀, 개구리, 메뚜기가 없었어요 우리가 하도 잡아먹어서요 생식도 많이 했습니다.
파뿌리 같은 거 눈에 띄면 뜯어 먹고 새순이 나면 나는대로 다 뜯어먹고 한참 배가 고플 나이니까 닥치는 대로 주워 먹었어요...

- 1967년 14살 입소해 1974년 21살 퇴소한 천종수씨

"급식표 현실과 달라" 근무자 증언
당시 경기도 '아동발달 저해' 인지

경인일보가 확보한 1980년 10월 선감학원 아동급식 계획표를 보면 조식과 중식, 석식을 기준으로 매끼 밥과 국, 장아찌·마늘쫑, 김치·오이지 등 두가지 반찬이 구성돼 있지만 계획표에서만 가능한 식단이었다. 당시 아동으로 수용됐던 피해자들과 선감학원 근무자들 모두 현실은 달랐다고 증언한다.

"애들 먹는 식사관계서부터 안 좋죠. 수용시설에 준해 운영이 되었기 때문에. 예산지침 자체가 수용시설에 준해 있었어요. (1980년부터 82년까지 회계담당으로 근무한 직원)"

부실한 먹거리였지만 아동들이 감당해야 하는 노동 수준은 가혹할 만큼 강도가 높았다. 직업교육을 명목으로 목공반, 이발반, 양잠반 등을 구성해 놓았지만 사실상 논·밭농사, 양잠, 축산, 염전 등 강제노역에 투입됐다.

경기연구원이 2020년 선감학원사건 피해사례를 조사 분석한 자료를 살펴보면 1주일 중 7일 노동을 했다는 응답이 53.5%로 가장 높았고 6일이 32.4%, 5일 9.9% 순이다. 하루 평균 노동시간은 10시간이었고 11시간 이상 노동했다는 응답도 23.9%로 적지 않았다.

노동시간이 10시간을 넘는데, 제대로 된 교육을 받았을리는 만무하다. 일부 아동들이 당시 선감국민학교를 다니기도 했지만 절반가량은 학교를 다니지 못했다. 수용 중 교육경험을 묻는 질문에 46.1%가 학교를 다니지 못했다고 답했고 선감학원 안에서 학교 교육을 받았다는 응답은 7.9%에 그쳤다.

선감학원은 아동보호시설이 아니라 사실상 포로수용시설에 가까운 폭력적인 행태로 운영됐다. 문제는 경기도 역시 이 같은 운영방식이 원인이 돼 아동들의 정상지능 발달은 물론, 사회생활이 어렵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1979년 경기도가 작성한 선감학원 현황 및 사업계획 상에 '도서에 감금되어 있다는 강박감, 장기 외계 단절로 인한 정상지능 발달 저해로 장기 수용 아동의 전원조치'라고 명시됐다. 또 '기술자 확보 지난으로 정상교육이 불능, 수용아동의 지능으로 보아 교육 효과도 전무'하다며 축산부 폐지를 계획한 바 있다.

1980년 경기도 부녀아동과가 작성한 지방자치단체 보유 공공사업 사무 이관 및 위탁불하 촉구에는 '대부분 아동이 불우하고 극한적인 상황하에서 비정상적으로 성장해 정상적인 사고력 결여'됐다며 그 예로 '흡연, 도벽, 구걸, 자해, 불량성"을 거론했고 "방황의 여지, 독사사형, 흡연으로 인한 화재, 도주시 익사, 견물생심 도벽' 등도 문제로 적시했다.

이는 국가의 인권침해가 아동의 발달에 저해가 됐다는 점을 당시에도 '인정'하고 있었다는 증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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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임금 착취에
일 못하면 뭇매
도망치면
'수배령'

부랑아 갱생 목적과 달리 노역 동원
당시 근무자·피해자 진술·공문 확인
생산품 팔아 인건비 아닌 운영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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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감학원에 마구잡이로 수용된 아동들은 당초 부랑아 갱생·교육이라는 목적과 달리, 각종 노역에 동원되며 '노동 착취'에 시달렸다.

경인일보가 확보한 당시 선감학원 근무자와 피해자 진술, 공문서 등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학교에 다녔던 아동은 학교가 끝난 후부터, 학교에 다니지 않았던 아동은 종일 일을 한 것인데, 임금을 받지 못한 것은 물론 일을 못 하면 폭력이 가해졌다.

"…그 많은 농사를 짓고 작물을 키우고 했는데, 우리한테 이만큼도 준 거 없고 노임(임금)을 준 것도 없고 나온 물건을 우리에게 먹여준 적도 없고 그걸 다 어떻게 했느냐 말이지요.…내 품(일)을 못하면 저녁에 기합받고 얻어맞고 해야 돼요…무릎 같은데 상처 많은 사람은 다 조인트 맞은 거야"(1966년 선감학원에 수용된 피해자 녹취록)

경기도로 관할기관이 넘어온 이후 1957년 제정된 '경기도 선감학원 조례'는 선감학원의 임무를 이렇게 규정했다. 부랑아 수용보호, 자립 생활에 필요한 1인 1기의 교육지도, 농지 및 염전관리, 기타 학원 운영상 필요한 사항.

1963년 해당 조례가 전부 개정되면서 선감학원 업무는 부랑아의 수용구호, 부랑아의 지도 및 직업보도 등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당시 선감학원에서 근무했던 이들의 진술을 보면 아동들은 조례에 규정된 것과는 다르게 제대로 된 직업교육을 받지 못했으며 1980년 경기도 부녀아동과의 선감학원 위탁 운영 계획을 보면 선감학원을 '도유재산 관리기관'으로 규정했다. 

겨울에는 주로 원생복 수선을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취지와는 다르게 직업으로 연결될 수 있는 환경은 아니었어요. 직업으로 연결되려면 실습이 있어야 하는데 다양한 실습 거리가 없었어요. (1965년~1967년 선감학원 재봉반 담당교사)

이렇게 종일 아동들이 일해서 생산된 물품을 판 돈은 아동들의 인건비가 아닌, 선감학원 운영비로 쓰였다. 당시 선감학원 예산항목에서 원생을 위해 쓰인 예산은 '수용 관리' 항목이 전부였다. 1947년 11월 18일 경인일보 전신인 '대중일보'에 보도된 선감학원 기사에서도 선감학원은 '자급자족'을 목적으로 운영됐다.


기사에는 경기도가 선감도에 거주 중인 일반 농가의 철거를 명령했으며 이를 통해 선감학원 경작 면적이 넓어져 자급자족이 가능하고 그 수입으로 원아들의 갱생 후 생활 대책을 수립할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여기(선감학원)는 수용시설이기 때문에 임금이라는 것은 노동의 대가인데,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독립자금을 줬는지 자립을 시켜줬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제 업무에 그런 것은 없었습니다."(1980년~1982년 선감학원 회계담당 근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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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일보가 경기도기록원 등을 통해 확보한 당시 선감학원 관련 문서 중 1982년 '경기도 선감학원 현황-장기수용아동의 전원조치'. 

1982년 민간위탁 실패로 최종 폐지
14살 아동 '유흥음식점'에 보내기도

1982년 민간위탁에 실패한 경기도가 선감학원의 최종폐지를 결정하고 문을 닫을 때 일부 아동들은 '고용위탁'됐다. 귀가조치되거나 다른 시설로 옮기지 못한 아이들을 일손이 모자란 주변 섬이나 육지 등 농가에 취업시킨 것인데, 고용주인 농민이 아동을 '보호'하는 식으로 사후책임을 떠넘겼다.

 

당시 문서를 살펴보면, 선감학원 폐지 결정에 따른 아동수용 전원계획에서 경기도는 총 75명의 원생 중 7명을 고용 위탁한 것으로 나타났다. 고용 위탁된 아동들은 주로 농업, 축산업 등에 종사했다. 이들 중 상당수는 고된 노동을 견디다 못해 도망갔다.

경기도는 고용 위탁된 아동들이 도망갔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수배령'을 내리기도 했다. 경인일보가 확보한 1982년 9월 8일 경기도의 '가출아동 수배 의뢰'에 적힌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선감학원 수용 중 고용 위탁된 아동의 가출 신고가 있어 귀 시군에 수배 의뢰 하오니 관내에 널리 홍보해 수배에 힘써 주시기 바라며 아동이 발견되면 본도에 연락하기 바랍니다'.

당시 경기도는 이 같은 문서를 서울, 인천시에 보냈으며 문서에는 도망간 아동의 인상착의와 특기사항이 구체적으로 적혀있다. '김O호, 남, 15세, 키 160센티정도. 둥근 얼굴이며 머리 속에 칼로 그은 흉터가 7군데 있고 눈 밑, 왼손에 흉터가 있음'.

경기도는 도망간 이유를 아동의 탓으로 돌렸다. 고용주에 대해서는 미성년자들에 대한 보호 선도는 물론 기술 습득으로 사회 진출에 기여하고자 하는 의욕이 절실하다고 한 반면 아동들에 대해서는 '대부분이 사회적으로나 가정적으로 결함이 있는 아동들로 현재 고용된 생업에 적응을 못하고 이탈하는 사례가 많음'이라고 했다.

특히 이 가운데 14살이었던 한 피해 아동은 '유흥음식점'에 보내진 경우도 있었다. 황당한 것은 경기도는 고용주들로부터 아동복리법을 준수하라는 서약서도 받았는데, 1982년 당시에도 아동복리법상 14세 미만의 아동은 주점, 기타 접객 영업 등에 종사하는 것이 금지돼 있었다.

선감학원을 탈출해도, 문을 닫아도 아동들은 쉽게 선감학원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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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 건 탈출' 비료 포대 쓰고 갯벌로

어둑한 밤, 비료 포대를 뒤집어쓴 아이들이 하수구 통로에 쪼그려 앉아있다. 눈앞엔 바닷물이 빠진 갯벌이 펼쳐진다. 숨죽여 통로를 빠져나온 아이들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펄로 내달린다. 목적지는 선감도에서 1㎞ 가량 떨어진 어섬. 갯벌에 다다르자 아이들이 일제히 엎드린다. 아이들 배에 비료포대와 차가운 펄이 맞닿는다. 손으로 질퍽한 땅을 밀어내며 앞으로 나아간다. 이대로 800m만 가면 된다. 달음질로는 하루에도 몇 번을 오갈 수 있는 거리. 아이들의 팔이 노를 젓는 것처럼 바삐 움직인다. 그러나 좀처럼 속도가 나지 않는다.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하니 체력도 금세 동난다. 어느새 물이 다시 밀려든다. 앞으로도, 뒤로도 가지 못하는 아이들이 서서히 물에 잠긴다.

섬 떠나려다, 세상 떠난 아이들… 기록되지 않은 죽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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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육 선생님의 호출이다. 방문 너머 들리는 목소리로 보아 단단히 화가 난 듯하다. 불호령이 떨어지자마자 기숙사에 사는 원생 100여명이 복도 양쪽으로 도열한다.

옷소매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는 애들 몇 명이 고개를 푹 숙인 채 복도 끝에 서 있다. 때리란다. 선감도 밖으로 탈출을 시도했던 놈들이니 흠씬 두들겨 맞아야 한단다. 가까스로 죽음을 면한 대가는 지독한 구타다.

국가가 묵인하고 경기도가 만든 '부랑아들'의 꿈은 지옥 '선감도'를 탈출하는 것이다. 죽음과 폭력의 두려움도 이들의 탈출 시도를 막지 못했다.

진실화해위원회가 선감학원 원아대장 4천689건에 기재된 퇴원 사유를 분석한 결과, 이 중 17.8%(834명)가 섬을 탈출해 빠져나갔다. 탈출하는 아이들은 목숨을 걸어야 했다. 원아대장으로 확인 가능한 선감학원 사망자는 모두 24명인데, 이 중 7명(29.1%)이 몰래 섬을 탈출하다 물에 빠져 숨진 것으로 기록돼 있다.

아이들은 주로 대부도나 어섬 방면으로 탈출을 시도했다고 한다. 선감도와 가장 가까웠던 대부도는 익사할 위험은 적었으나 주민들의 신고로 다시 붙잡혀 돌아갈 가능성이 높았다. 어섬은 경로가 험난한 반면,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하기만 하면 마산포를 거쳐 육지로 이동하기 편했다.

 

사고는 대개 어섬으로 탈출을 시도했던 원생들에게서 발생한 것으로 파악됐다. 갯벌을 걸으면 발이 무릎까지 빠지기 때문에, 아이들은 주로 엎드린 상태에서 움직였다고 한다. 손으로 땅을 미는 동력을 이용해 갯벌을 건너려는 것인데, 탈출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까 미끌한 소재인 비료 포대를 뒤집어쓴 아이들도 있었다.

변수는 이들의 영양상태였다. 나이가 어려 팔 힘이 좋지 않았고,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해 체력까지 부족했다. 탈출에 실패한 것을 직감하고 할 수 없이 선감도로 다시 돌아온 아이들은 목숨은 부지했지만 보복을 당했고, 끝까지 탈출을 감행한 아이들은 끝내 시신으로 바다에서 건져졌다.

이렇게 돌아온 아이들의 시신은 아무렇게나 매장됐다. 원아대장을 통해 알 수 있는 사망자의 수는 24명뿐이지만, 선감학원 희생자들의 유해가 묻혔을 것으로 현재 추정되는 봉분만 140~150기에 달한다. 더욱이 경인일보가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원아대장에는 사망 사실이 기록돼 있지 않지만, 선감초등학교 생활기록부에는 숨진 사실이 기재된 원생들도 있었다.

이를 통해 확인된 추가 사망자 5명 가운데 3명 또한 탈출을 시도하다 목숨을 잃었다. 원아대장 퇴원 사유에는 탈출이라고 적혀 있으나 실제로는 탈출 도중 사망했거나 퇴원한 사유가 적혀있지 않은 642명(13.7%) 중에서도 사망자가 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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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차도, 책임도 없는
주먹구구식 암매장

단속만 집중 '거주지 파악' 부실… 장례·애도 없이 시신 암매장

선감학원 사망 아동들은 강제 노역과 폭력에 노출돼 병에 걸려 죽거나 탈출을 감행했다 실패해 '익사'했다. 경인일보가 확보한 '선감학원 퇴원사유' 자료에 따르면 '사망'이라 기재된 아이들은 총 24명이었지만, 피해자와 근무자 진술을 통해 이보다 훨씬 많은 최소 수백명의 아동들이 선감도에서 생을 마감했다고 파악됐다.  현재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150구 이상 묻혀있다 판단해 유해발굴을 추진 중인 안산시 단원구 선감동 공동묘역 부지는 당시 원생 사이에서 '공동묘지'라 불렸던 언덕이다. 죽은 아이들은 어떠한 장례 절차나 죽음을 애도하는 의식도 없이 이곳에 묻혔다.

"도망간 지 열흘만에 시신으로 떠밀려온 동기가 있었어요. 공동묘지에 그 친구가 묻혔는데, 장마가 오거나 바람만 엄청 세게 불어도 묘지 흙이 다 쓸려 내려 시체들이 다 밖으로 나와 버렸어요."(1966년 10월 수원 일대 경찰의 부랑아 단속에 걸려 선감학원에 입소된 이모씨)

암매장은 책임지는 이 없이 아이들 손에 맡겨졌다. 지옥 같은 선감도 안에서 같은 날 잡혀들어와 '동기'라는 연대를 쌓고, 같은 방을 쓰며 동고동락한 '친구'가 시신이 돼 돌아와도 슬퍼하거나 거부도 하지 못한 채 경기도 공무원의 지시에 따라 삽을 들고 나서야 했다. 죽은 친구의 시신을 아무렇게나 땅에 파묻도록 방치한 국가가 원망스럽고, 이 시신을 묘지까지 들고 날라 땅에 파묻는 자신이 마치 공범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소름이 끼쳤다. 그러나 두려움과 친구의 죽음을 슬퍼할 틈도 없이 새로운 아이가 죽어 돌아왔다. 그나마 해줄 수 있는 건 산에 핀 꽃 한송이 꺾어 놓아주는 일 뿐이다.

"선생님(직원)이 불러 따라갔더니, 탈출한 지 2주 만에 죽은 원아 시신을 저한테 묻으라 했어요. 묻을 때 경찰이나 의사는 없었어요. 그냥 나를 부르면 '또 묻으러 가는구나' 하고, 그냥 열심히 묻었어요."(1956년 9살의 나이로 구두닦이를 하다 선감학원에 잡혀 온 강모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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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을 수도, 찾아 나설 수도 없는 선감의 아동들

부랑아처럼 보인다는 이유로 끌려온 아동 상당수가 가정이 있었다. 아동들을 잡아간 공무원도, 선감학원 직원들도 돌아갈 집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수용 사실을 부모에게 알리지 않았다. 당시 경기도가 작성한 문서를 보면 '가정통신문'을 일부 가정에 발송했다고 적혀 있지만, 실제는 대다수 반송되거나 도착하지 못했다.

경기도는 부랑아를 단속하는 데만 급급해 아동들의 정확한 거주지를 파악하는 절차를 진행하지 않았다. 경기도 공무원들은 잡아온 아동들의 진술에만 의존해 주소를 작성했는데 잡혀올 당시 대부분 10세 전후의 어린 아이들이 정확한 집 주소를 기억해 내기엔 불가능에 가까웠다.

이렇다 보니 원아대장에 적힌 아동들의 주소는 대부분 경기도 인천시(현 인천광역시), 부천시, 서울시 사당동과 같이 불명확하게 작성됐다. 도 직원들이 형식적으로 보낸 통신문 역시 주소불명으로 반송되기 일쑤였고, 가정에 통보되지 않은 건 철저히 주소를 제대로 말하지 못한 아동의 책임이었다. 일부 아동들은 자신의 학교까지 기억해 부랑아가 아님을 증명했지만, 묵살당했다.

 

"가평에 집이 있고, 가평에 국민학교를 다닌다고 분명히 얘기했어요. 학교에 전화 한 통이라도 했으면 잡혀가지 않았을 텐데, 그저 구두닦이로 보인다는 이유로 연락 하나 보호자들에게 돌리지 않았어요."(1973년 13살의 나이로 선감학원에 입소된 한일영씨)

부모들은 사라진 아이를 애타게 찾으러 나섰다. 경찰서에도 가보고 시청, 읍면동사무소 등 닿을 수 있는 국가기관에 도움을 청했다.

'아이가 일주일 째 돌아오지 않고 있다', '시청 직원이 우리 아이를 데려가는 걸 누군가 봤다고 한다' 등 구체적 정황까지 말했지만, 돌아온 대답은 "모른다"였다.

국가인권위원회가 작성한 '선감학원 아동인권침해사건 보고서'의 연구책임자인 정진각 안산지역사연구소 소장은 "인권보고서 작성 당시 한 피해자 부모가 수원시청 공무원이 아이를 잡아가는 걸 이웃이 봤다고 듣고 곧바로 시청에 실종 신고했다. 그러나 시청은 그런 아이 모른다, 일없다는 식으로 내쫓았다고 진술했다"고 전했다.

사실상 선감학원에 잡혀온 이상, 아동 스스로 벗어날 수 있는 방법도, 부모가 아이를 찾아내는 방법도 모두 철저히 국가가 차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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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감학원 피해자 유해매장 추정지 시굴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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