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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가 나를 부랑아로 만들었다.

그래서 나는 부랑아가 됐고,

부랑아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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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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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도'에 갇힌 4689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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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공지영, 배재흥, 신현정, 고건, 김동한 

영상 : 김동현 | 그래픽 : 박성현, 성옥희

​편집 : 박주우, 연주훈, 김금아

Part2. 악몽을 살다

우리는 확인하고 싶었다. 선감도에 소년을 가두고, 선감학원을 운영하며 소년의 인권을 유린한 주체가 누구인지. 경기도가 보유한 선감학원의 기록을 하나하나 끄집어내 우리는 그것이 경기도, 나아가 국가가 자행한 일임을 두 눈으로 명확히 확인했다.

우리는 들어야 했다. 지옥도라 불린, 그 섬에 갇혀 유년을 보내야 했던 소년들이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지. 온전하지 못한 삶의 원류는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인지, 중년이 된 소년들에게 직접 들어야 했다.

01

우린 생존만이 숙제였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동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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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도 모르고 선감도에 끌려가 강제노역과 무자비한 폭력에 시달렸던 까까머리 원생들은 수십년의 세월이 지나 머리가 희끗한 나이가 돼서도 과거의 고통스런 기억에 갇혀 신음하고 있다. 지난 2018년 선감학원 피해 생존자 14명이 선감도에서 숨진 원생들의 묘역을 정리하다 남긴 기념사진.  /고(故)이대준씨 유족 제공

'지옥도'에서 유년 보낸 사람들
중년·노년이 되어도 불안·공포

소년들은 말한다. 나는 부랑아가 아니었다고. 가난했지만 함께 온기를 나누는 가족이 있었고 나이에 맞게 성장하고 교육받을 권리가 있었다. 선감학원에 가지 않았다면 지극히 평범하게 일상을 살아가는 당신들과 같았을 것이라고 분명히 말했다.

소년들의 유년을 송두리째 흔든 선감학원의 기억은 청년이 되고, 중년이 되고, 노인이 되어서도 그들을 불안과 공포에 잠식당하게 했다. 부랑아가 아니었지만, 부랑아가 되었고 지금도 부랑아로, 정착하지 못한 채 부유하듯 살아가는 그들은 '선감학원 피해자'들이다.

우리가 만난 피해자들은 하나같이 말했다.

"국가가 나를 부랑아로 만들었다. 그래서 나는 부랑아가 됐고, 부랑아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특히 피해자들은 지옥과 같던 그 날들을 입 밖에 꺼내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 이들이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의 본격적인 조사가 시작되고, 경기도가 공식적인 사과에 나서면서 그간 억눌러왔던 마음들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그렇게 진성·진동(가명) 형제를 만났다. 세간의 눈초리가 무서워 숨어 살아야 했던 형과, 다 잊고 잘 살고 있는 것처럼 스스로를 속이며 살아야 했던 동생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묻고 싶다.

부랑아의 기준이 무엇이고 부랑아임을 확신했던 그 이유를. '공적' 임무를 띤 공무원들이 가족의 생계를 위해 거리에서 돈을 벌고, 집 앞에서 친구들과 뛰어놀고, 오랜만에 시내로 놀러 나온 형제를 무작위로 잡아가야 했던 이유를 알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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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랑으로 떠밀린 형제… 고통의 불은 아직 환하다

02

숨죽여 살아온 50년,
진성씨 이야기

진성(62·가명)씨는 살면서 잠을 제대로 이룬 날이 없다. 적어도 그가 기억하는 날 중에는 편안히 잠을 자 본적이 없다. "견디다 못해 도망을 갔다가 붙잡혀서 창문도 없는 창고에서 일주일 동안 갇혀 있었어요. 지금도 불을 켜지 않으면 잠을 잘 수 없고 깜빡 잠이 들어도 자꾸 깨고 (괴롭힘을 당하는) 꿈을 꾸고.. " 그는 온 방을 환하게 불을 켜야만 하고, 누가 등 뒤에 있으면 불안해서 잠을 자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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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불을 켜지
않으면 잠을 잘 수 없어요

숨죽여 살아온 50년, 형 진성씨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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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을 하고서도 집사람이 제 등 뒤에서 잠을 못 자요. 불도 환하게 켜 놔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아예 거실에 나와서 불을 켜놓고 잡니다. 그래도 늘 자다가 소리를 지르고 울기도 해서.. 가족들이 너무 힘들죠." 그래서 그는 약의 기운을 빌려야만 한다. 아주 오랫동안 신경안정제, 수면제 등을 처방받아 복용하고 있다.

"저녁마다 약을 먹어요. 그래야 그나마 토막잠이라도 자니까.. 약 기운이 떨어지면 힘이 드니까 몸을 계속 괴롭혀요. 너무 피곤해서 쓰러질 때까지 뭐라도 계속 해요. 그래서 피곤하면 그때 약을 먹고 잡니다. 그러지 않으면 지금 견딜 수가 없어요.."

잠을 이루지 못하는 지금의 삶을 이야기하면서, 흰머리가 희끗한 중년의 남자는 눈물을 쏟았다. 그 눈물이 몹시 서럽다. 흡사 50년 전 그 날의 어린아이 같았다. 하루도 그 날들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그는 말했다.

"직장생활이 무척 힘들었어요. 사람들이 나를 두고 수군대는 것 같고.. 그런 기분이 계속 들어 견디질 못했어요. 제일 길게 직장생활을 한 게 6~7개월 정도. 도저히 직장은 못다닐 것 같아 조경을 배워 조경사로 일했는데 나이가 들고 힘이 들어 그만둔 후로는 대부분 운전하는 일을 했습니다. 주로 화물트럭이나 심야버스 같이 밤에 운전하는 일이요. 어차피 밤에 잠을 잘 못 자니까 그게 차라리 나았어요. 혼자서 조용히 일할 수 있고.. 그나마도 지금은 코로나로 일거리가 끊겼지만.." 

같은 하늘 아래 숨 쉬고 있지만, 그는 숨조차 제대로 내뱉지 못한 채 반평생을 살았다.

 

선감학원에서 겪은 충격으로 그 이전의 기억은 이제 희미해졌지만, 적어도 진성씨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있었고, 형제들과 도란도란 지내며, 초등학교를 다니던 평범한 아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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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선감동 공동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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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선감동 공동묘지

죽어야만

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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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다니던 평범한 아이
선감학원 충격 느끼며 반평생

"그때가 방학이었던 것 같아요. 외할머니댁에서 동생이랑 있었는데, 할머니가 (수원) 남문시장에 농사지은 오이, 호박을 팔러 나간다고 해 따라갔어요. 우리가 심심해하니까 할머니는 수원역에서 일하고 있던 형에게 잠시 놀러 다녀오라고 했어요. 할머니가 버스를 태워줬고, 수원역에 내려 형을 만나 조금 놀다가 형이 잠깐 일하러 간 사이에 대합실에서 동생이랑 깜빡 잠이 들었나봐요. 눈을 떠보니 나랑 동생이 공중에 들려서 어디론가 잡혀가고 있었어요.

 

할머니가 기다린다, 형이 여기서 일한다고 얘기를 해도 소용이 없었어요. 울지도 못하게 발로 차고 때리고.. 그렇게 역전 앞 부녀보호소에 끌려가 보니 먼저 잡혀 온 얘들이 스무명 쯤 있었어요. 그때 우리 형이 우리를 찾아서 왔고 데려가겠다고 했어요. 경찰 복장을 한 사람이 형을 데리고 나가서 이야기하고 오더니, 먹여도 주고 학교도 보내주겠다고 말하고는 형더러 가라고 했어요. 형이 그렇게 가고 우리는 차를 타고 어디론가 끌려가는데, 오목천을 지나가대요. 할머니 집이 오목천이고 우리는 그 길을 너무 잘 알았거든요. 동생이랑 울부짖으면서 할머니 집이 저기라고, 주소까지 정확하게 말했지만 아무리 얘기해도 내려주지 않았고 오히려 맞았어요.

그때 제가 10살, 동생이 8살이었습니다."

진성씨는 마음 한편에 맺힌 가족을 향한 응어리를 말했다. 지금도 형을 형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한번은 따져 물었다. "네가 우리를 보낸 것 아니냐고, 너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됐다고. 할머니, 엄마가 우리를 그렇게 찾을 때 네가 말 한마디 했으면 됐지 않았냐"고 원망을 쏟아냈다.

형은 말을 하지 못했다. 그 역시 어린 아이였고, 그저 경찰이 무서웠다고, 일도 못하게 하고 잘못을 끄집어 내 트집잡을 지 몰라 두려웠다고 했다.

"나는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아니 지금도 엄마를 원망합니다. 고속도로 톨게이트 앞에 '송혜희를 찾아주세요' 그 현수막을 운전하는 몇 십년째 보고 있는데, 다른 집은 새끼가 없어지면 그렇게 찾잖아요. 그런데 왜 엄마는 끝까지 찾지 않았냐고, 돌아가실 때까지 그 마음을 풀지 못했어요. 내 인생이 너무 힘들 때마다 엄마한테 왜 찾지 않았냐 원망하며 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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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살, 4살 무렵의 진성·진동 형제

끌려온 다음날부터 성폭행 당해
동생만은 지켜준다 약속에 참아

선감학원에 끌려간 다음날부터 지옥은 시작됐다. 그가 당했던 끔찍한 일을, 그는 '그런 일'이라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하면서 손을 떨고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 말조차 제대로 잇지 못했다.

"선감학원에 들어오고 다음날부터 (성)폭행을 당하기 시작했어요. 지금도 저는 화장실에 잘 못 가요. 그때 기억이 자꾸 떠올라서.. 견디다 못해 (선감학원) 직원에게 그 일을 이야기했는데, 방만 옮겨주고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았어요.
제가 이걸 참으면 동생은 책임지고 지켜주겠다고 했어요. 동생은 학교도 보내주고 그런 일 없게끔 해주겠다고.. 그래서 참았어요." 정작 동생은 함께 지내지도 못했다. 아니, 절대 만나면 안됐다. 그게 그곳의 법이었다. 그래도 동생이 걱정되고 보고파, 동생이 학교 끝나고 돌아오는 길목에 숨어 몰래 얼굴을 보곤 했는데, 동생은 학교에서 간식으로 나눠준 건빵을 남겨와 형에게 건넸고, 형은 일하다 잡은 개구리나 쥐를 구워 동생에게 먹이곤 했다. 그게 서로를 지키는 최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