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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가 나를 부랑아로 만들었다.

그래서 나는 부랑아가 됐고,

부랑아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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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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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도'에 갇힌 4689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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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공지영, 배재흥, 신현정, 고건, 김동한 

영상 : 김동현 | 그래픽 : 박성현, 성옥희

​편집 : 박주우, 연주훈, 김금아

Part2. 악몽을 살다

우리는 확인하고 싶었다. 선감도에 소년을 가두고, 선감학원을 운영하며 소년의 인권을 유린한 주체가 누구인지. 경기도가 보유한 선감학원의 기록을 하나하나 끄집어내 우리는 그것이 경기도, 나아가 국가가 자행한 일임을 두 눈으로 명확히 확인했다.

우리는 들어야 했다. 지옥도라 불린, 그 섬에 갇혀 유년을 보내야 했던 소년들이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지. 온전하지 못한 삶의 원류는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인지, 중년이 된 소년들에게 직접 들어야 했다.

01

우린 생존만이 숙제였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동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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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도 모르고 선감도에 끌려가 강제노역과 무자비한 폭력에 시달렸던 까까머리 원생들은 수십년의 세월이 지나 머리가 희끗한 나이가 돼서도 과거의 고통스런 기억에 갇혀 신음하고 있다. 지난 2018년 선감학원 피해 생존자 14명이 선감도에서 숨진 원생들의 묘역을 정리하다 남긴 기념사진.  /고(故)이대준씨 유족 제공

'지옥도'에서 유년 보낸 사람들
중년·노년이 되어도 불안·공포

소년들은 말한다. 나는 부랑아가 아니었다고. 가난했지만 함께 온기를 나누는 가족이 있었고 나이에 맞게 성장하고 교육받을 권리가 있었다. 선감학원에 가지 않았다면 지극히 평범하게 일상을 살아가는 당신들과 같았을 것이라고 분명히 말했다.

소년들의 유년을 송두리째 흔든 선감학원의 기억은 청년이 되고, 중년이 되고, 노인이 되어서도 그들을 불안과 공포에 잠식당하게 했다. 부랑아가 아니었지만, 부랑아가 되었고 지금도 부랑아로, 정착하지 못한 채 부유하듯 살아가는 그들은 '선감학원 피해자'들이다.

우리가 만난 피해자들은 하나같이 말했다.

"국가가 나를 부랑아로 만들었다. 그래서 나는 부랑아가 됐고, 부랑아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특히 피해자들은 지옥과 같던 그 날들을 입 밖에 꺼내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 이들이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의 본격적인 조사가 시작되고, 경기도가 공식적인 사과에 나서면서 그간 억눌러왔던 마음들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그렇게 진성·진동(가명) 형제를 만났다. 세간의 눈초리가 무서워 숨어 살아야 했던 형과, 다 잊고 잘 살고 있는 것처럼 스스로를 속이며 살아야 했던 동생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묻고 싶다.

부랑아의 기준이 무엇이고 부랑아임을 확신했던 그 이유를. '공적' 임무를 띤 공무원들이 가족의 생계를 위해 거리에서 돈을 벌고, 집 앞에서 친구들과 뛰어놀고, 오랜만에 시내로 놀러 나온 형제를 무작위로 잡아가야 했던 이유를 알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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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랑으로 떠밀린 형제… 고통의 불은 아직 환하다

02

숨죽여 살아온 50년,
진성씨 이야기

진성(62·가명)씨는 살면서 잠을 제대로 이룬 날이 없다. 적어도 그가 기억하는 날 중에는 편안히 잠을 자 본적이 없다. "견디다 못해 도망을 갔다가 붙잡혀서 창문도 없는 창고에서 일주일 동안 갇혀 있었어요. 지금도 불을 켜지 않으면 잠을 잘 수 없고 깜빡 잠이 들어도 자꾸 깨고 (괴롭힘을 당하는) 꿈을 꾸고.. " 그는 온 방을 환하게 불을 켜야만 하고, 누가 등 뒤에 있으면 불안해서 잠을 자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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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불을 켜지
않으면 잠을 잘 수 없어요

숨죽여 살아온 50년, 형 진성씨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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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을 하고서도 집사람이 제 등 뒤에서 잠을 못 자요. 불도 환하게 켜 놔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아예 거실에 나와서 불을 켜놓고 잡니다. 그래도 늘 자다가 소리를 지르고 울기도 해서.. 가족들이 너무 힘들죠." 그래서 그는 약의 기운을 빌려야만 한다. 아주 오랫동안 신경안정제, 수면제 등을 처방받아 복용하고 있다.

"저녁마다 약을 먹어요. 그래야 그나마 토막잠이라도 자니까.. 약 기운이 떨어지면 힘이 드니까 몸을 계속 괴롭혀요. 너무 피곤해서 쓰러질 때까지 뭐라도 계속 해요. 그래서 피곤하면 그때 약을 먹고 잡니다. 그러지 않으면 지금 견딜 수가 없어요.."

잠을 이루지 못하는 지금의 삶을 이야기하면서, 흰머리가 희끗한 중년의 남자는 눈물을 쏟았다. 그 눈물이 몹시 서럽다. 흡사 50년 전 그 날의 어린아이 같았다. 하루도 그 날들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그는 말했다.

"직장생활이 무척 힘들었어요. 사람들이 나를 두고 수군대는 것 같고.. 그런 기분이 계속 들어 견디질 못했어요. 제일 길게 직장생활을 한 게 6~7개월 정도. 도저히 직장은 못다닐 것 같아 조경을 배워 조경사로 일했는데 나이가 들고 힘이 들어 그만둔 후로는 대부분 운전하는 일을 했습니다. 주로 화물트럭이나 심야버스 같이 밤에 운전하는 일이요. 어차피 밤에 잠을 잘 못 자니까 그게 차라리 나았어요. 혼자서 조용히 일할 수 있고.. 그나마도 지금은 코로나로 일거리가 끊겼지만.." 

같은 하늘 아래 숨 쉬고 있지만, 그는 숨조차 제대로 내뱉지 못한 채 반평생을 살았다.

 

선감학원에서 겪은 충격으로 그 이전의 기억은 이제 희미해졌지만, 적어도 진성씨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있었고, 형제들과 도란도란 지내며, 초등학교를 다니던 평범한 아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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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선감동 공동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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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선감동 공동묘지

죽어야만

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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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다니던 평범한 아이
선감학원 충격 느끼며 반평생

"그때가 방학이었던 것 같아요. 외할머니댁에서 동생이랑 있었는데, 할머니가 (수원) 남문시장에 농사지은 오이, 호박을 팔러 나간다고 해 따라갔어요. 우리가 심심해하니까 할머니는 수원역에서 일하고 있던 형에게 잠시 놀러 다녀오라고 했어요. 할머니가 버스를 태워줬고, 수원역에 내려 형을 만나 조금 놀다가 형이 잠깐 일하러 간 사이에 대합실에서 동생이랑 깜빡 잠이 들었나봐요. 눈을 떠보니 나랑 동생이 공중에 들려서 어디론가 잡혀가고 있었어요.

 

할머니가 기다린다, 형이 여기서 일한다고 얘기를 해도 소용이 없었어요. 울지도 못하게 발로 차고 때리고.. 그렇게 역전 앞 부녀보호소에 끌려가 보니 먼저 잡혀 온 얘들이 스무명 쯤 있었어요. 그때 우리 형이 우리를 찾아서 왔고 데려가겠다고 했어요. 경찰 복장을 한 사람이 형을 데리고 나가서 이야기하고 오더니, 먹여도 주고 학교도 보내주겠다고 말하고는 형더러 가라고 했어요. 형이 그렇게 가고 우리는 차를 타고 어디론가 끌려가는데, 오목천을 지나가대요. 할머니 집이 오목천이고 우리는 그 길을 너무 잘 알았거든요. 동생이랑 울부짖으면서 할머니 집이 저기라고, 주소까지 정확하게 말했지만 아무리 얘기해도 내려주지 않았고 오히려 맞았어요.

그때 제가 10살, 동생이 8살이었습니다."

진성씨는 마음 한편에 맺힌 가족을 향한 응어리를 말했다. 지금도 형을 형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한번은 따져 물었다. "네가 우리를 보낸 것 아니냐고, 너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됐다고. 할머니, 엄마가 우리를 그렇게 찾을 때 네가 말 한마디 했으면 됐지 않았냐"고 원망을 쏟아냈다.

형은 말을 하지 못했다. 그 역시 어린 아이였고, 그저 경찰이 무서웠다고, 일도 못하게 하고 잘못을 끄집어 내 트집잡을 지 몰라 두려웠다고 했다.

"나는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아니 지금도 엄마를 원망합니다. 고속도로 톨게이트 앞에 '송혜희를 찾아주세요' 그 현수막을 운전하는 몇 십년째 보고 있는데, 다른 집은 새끼가 없어지면 그렇게 찾잖아요. 그런데 왜 엄마는 끝까지 찾지 않았냐고, 돌아가실 때까지 그 마음을 풀지 못했어요. 내 인생이 너무 힘들 때마다 엄마한테 왜 찾지 않았냐 원망하며 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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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살, 4살 무렵의 진성·진동 형제

끌려온 다음날부터 성폭행 당해
동생만은 지켜준다 약속에 참아

선감학원에 끌려간 다음날부터 지옥은 시작됐다. 그가 당했던 끔찍한 일을, 그는 '그런 일'이라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하면서 손을 떨고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 말조차 제대로 잇지 못했다.

"선감학원에 들어오고 다음날부터 (성)폭행을 당하기 시작했어요. 지금도 저는 화장실에 잘 못 가요. 그때 기억이 자꾸 떠올라서.. 견디다 못해 (선감학원) 직원에게 그 일을 이야기했는데, 방만 옮겨주고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았어요.
제가 이걸 참으면 동생은 책임지고 지켜주겠다고 했어요. 동생은 학교도 보내주고 그런 일 없게끔 해주겠다고.. 그래서 참았어요." 정작 동생은 함께 지내지도 못했다. 아니, 절대 만나면 안됐다. 그게 그곳의 법이었다. 그래도 동생이 걱정되고 보고파, 동생이 학교 끝나고 돌아오는 길목에 숨어 몰래 얼굴을 보곤 했는데, 동생은 학교에서 간식으로 나눠준 건빵을 남겨와 형에게 건넸고, 형은 일하다 잡은 개구리나 쥐를 구워 동생에게 먹이곤 했다. 그게 서로를 지키는 최선이었다. 

진성씨는 학교도 가지 못하고 하루종일 일만 했다. "밭일, 논농사, 닭도 키우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밥 먹는 시간 빼고는 계속 일만 했어요. 양잠하는 시기에는 밤에 잠도 못 자고 일해야 해요. 누에는 밤에도 뽕잎을 줘야 하거든요. 잠깐 자다 알람소리 울리면 일어나 한 시간 이상 뽕잎 주고 그러면 잠이 다 깨고 다시 잠 들만 하면 일어나 뽕잎 주고.. 비가 오는 날엔 뽕잎을 다 닦아서 누에를 줘야 해요. 매일 할당량이 있어서 그만큼 일을 다 못하면 '방장'이라는 사람한테 맞아야 하고 괴롭힘을 당해요. 직원들이 우리를 통제하는 수단으로 같은 원생 중에 나이 먹은 사람들, 직원들에게 협조하는 사람들을 숙소마다 '사장'으로 부르는 대장을 만들었고 각 방 마다는 방장을 만들었어요. 직원들이 윽박지르고 화내는 날이면 어김없이 매타작을 당해요. 곡괭이 자루 끌고 다니면서.. 겨울엔 옷을 홀딱 벗겨서 밖에 세워놔요. 그때 귀가 얼어 동상에 걸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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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때 기다리고 있다가 만난 소년
죽은채 바다서 떠밀려와 묻어줘

고작 10살의 나이에 시작된 폭행과 강제노역. 견디지 못하고 그는 갯벌로 뛰어 나갔다. 살기 위해 도망쳐야겠다고 생각했다. 갯벌을 걸어서 가는데 안으로 들어가면 갈수록 물이 많아 허벅지까지 빠졌다. 아직 저 섬까지 걸어가려면 한참 남았는데, 벌써 갯골에 거품처럼 물이 차올랐다.  

 

"'아, 잘못 계산했구나' 싶어 다시 힘들게 빠져나왔어요. 일단 창고에 숨어 다음 물때를 기다리고 있는데 잡혔습니다. 창문도 없는 창고에 갇혀 물도 먹지 못했어요. 그 뒤로 도망갈 생각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거기서 친해진 친구가 내가 매일 밤 폭행을 당하는 걸 알았어요. 어느 날 뜬금없이 그 친구가 '네 집 주소가 뭐냐'고 묻길래 알려줬습니다. 어디서 구했는지 연필을 가져와 집 주소를 적더니 1년쯤 지난 뒤 '내가 나가서 너희 집에 연락해주마, 너희 엄마 데리고 오마'라고 말하곤 바다로 나갔어요. 얼마 안 지나 (바다에서) 누가 떠밀려왔다고 나가봤더니 그 아이가 죽어 있었어요. 얼굴이랑 팔에 소라가 잔뜩 붙어있는 채로..

 

내가 이쪽 어디에 그 아이를 묻어주었는데 위치가 정확히 기억이 나질 않아요. 내가 여기 올 때마다 꼭 묘역에 들러 그 아이를 찾는데 찾질 못합니다. 그 아이는 어디선가 기다리고 있을 텐데.. 내가 너무 미안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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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매려는 순간 축산부 직원 발견
"책임지고 보내줄게" 이후서야 탈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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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성씨가 선감학원을 나올 수 있었던 건, 죽음의 문턱에서였다.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그는 아프다고 말해 얻은 약을 무조건 모았다. 그의 나이 열다섯이었다.

"아무 약이나 먹으면 무조건 죽는 줄 알았어요. 축산부에 건초를 저장하는 장소가 있거든요. 거기에서 약을 먹고 목을 매려고 하는데, 축산부 직원에게 발각됐죠. 약을 다 뺏겼어요. 축산부 직원이 나를 보더니 '내가 책임지고 너희 둘 내보내 줄게. 나이도 어린데, 죽지 마라. 동생 혼자 남으면 어떻게 사니' 그러고 정말 얼마 안 있다 여기서 나갔던 것 같아요."


인터뷰를 진행하는 내내 그는 계속 울었다. 흐느낌 속에서도 또렷한 말로 "나는 부랑아가 아니었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당시 민주공화당원이었고 수원 사무총장도 한 사람이에요. (선감학원 가서도) 계속 우리 집 주소를 말했고 집에 연락해달라고 애원했어요"를 반복했다.


부랑아가 아니었지만 선감학원에 끌려갔고, 그곳에서 그는 정말 부랑아가 돼버렸다고 말했다. 그래서 평생을 선감학원 출신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을까봐 숨어 살았다. 그러다 보니 그의 삶은 결국 부랑아가 돼 있었다. "이제와 생각하니 내가 선감학원에 왔다는 그 자체가 지금도 말 못할 일인가 싶어요. 저는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고 사람들한테 손가락질 받아야 할 이유도 없는데, 일단 여기 출신이라고 하면 온전한 눈으로 보지 않아요. 저는 부랑아가 아니었어요. 그 사람들이 그렇게 만든 거죠. 50년이 넘도록 나는 이렇게 현재진행형으로 아픈데, 이 일을 했던 사람들은 잘못했다는 소리를 온전하게 하지 않아요. 수천명 아이들을 그렇게 만들어놓고 그 사람들은 잘못했다고 하지 않아요."

수천명

아이들을

그렇게

​만들어놓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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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진 역랑에 쫓기듯 살아온 삶… "국가폭력 분명히 알려지길"

03

낙인 숨기며 살아온 50년,
동생 
진동씨 이야기

짧게 자른 머리에 깔끔히 정리한 눈썹과 수염, 부드러운 이미지를 더한 뿔테 안경까지. 선감학원 피해자 진동(60·가명)씨의 첫인상에서 지난날 고통의 흔적은 쉬이 찾아볼 수 없었다. 잘 정돈된 외형만큼 그의 표정과 말투에는 차분함이 느껴졌다. 지난 5일 안성 소재 자택을 방문한 취재진에게 오렌지 주스를 내어주던 그의 모습은 사뭇 여유로워 보였다. 그러나 부엌 식탁에 마주 앉은 진동씨의 호흡은 곧 가빠졌다. 여덟 살 나이에 선감도로 끌려갔던 당시 상황을 이야기해달라고 질문한 직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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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감도 갔다 오고 부랑아가 됐지
그 전에 부랑아는 아니었어요

낙인 숨기며 살아온 50년, 동생 진동씨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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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했던 그의 마음이 요동쳤다. 연신 눈물을 훔치던 진동씨의 두껍고 거친 손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모진 역랑 앞에 늘 쫓기듯이 살았을 그의 삶이 그려졌다.

진동씨는 선감학원과 관련한 모든 기억을 봉인한 채 살아왔다. 그는 기억의 공간 한편에 크고 단단한 벽을 둘렀다. 선감학원에서의 참혹했던 기억은 그 안에 전부 담았다. 스스로 잊고 살면 자신이 선감학원 출신이란 사실을 아무도 모를 거라 여겼다. 국가가 찍은 부랑아란 낙인을 숨길 그만의 방법이었다.

4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선감학원이란 존재를 애써 잊고 살던 진동씨에게 2년 전 한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발신처는 선감학원사건 피해자 신고센터. 과거에 당한 피해를 증명할 수 있는 서류를 떼 센터에 접수하라는 안내전화였다. 기억의 벽이 일순간 허물어진 순간이었다.

"센터 전화를 회사에서 받았는데, 하도 눈물이 나서 사무실에는 들어가지도 못했어요. 그날은 주차장 한편에 앉아 울다가 그냥 퇴근했어요. 그 이후로 운전을 하다가도, 혼자 앉아 있다가도 아무 이유 없이 계속 우는 거예요. 사람이 한순간에 무너져내린 그런 기분이었어요."

두 살 터울 형인 진성(62·가명)씨와 1970년 선감학원에 강제 입소하게 된 진동씨는 분명 부랑아가 아니었다. 삼형제는 당시 화성군 봉담면 내리에서 외할머니와 함께 지냈다. 가정사 문제로 부모님과 떨어져 살았지만, 형제의 신원을 보장할 보호자와 되돌아갈 집이 존재했다.

형제는 그러나 큰형이 돈벌이를 하던 수원역에 놀러갔다가 제복을 입은 경찰들에게 길거리 쓰레기 취급을 당하며 수집당했다. 5년간의 지옥 같은 삶이 시작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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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매맞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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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호자·집 있어도 수원역서 잡혀 끌려가
부실한 끼니 참고 황토 먹으며 5년 버텨

"마산포에서 배를 타고 선감도에 도착하자마자 밥을 줬어요. 반찬은 단무지랑 새우젓이었는데, 단무지는 손으로 누르면 푹 들어갈 정도로 삭은 상태였고, 믿을지 안 믿을지 모르지만 새우젓에 든 새우 머리를 뜯어 보면 조그만 구더기들이 있었어요."

한창 먹고 클 나이였음에도 식사는 언제나 부실했다. 진동씨는 변비로 고생할 것을 알면서도 흙을 퍼먹었다. 그만큼 굶주렸다. 황토의 반질반질한 부분은 흙이 아닌, 단맛만 나지 않는 초콜릿같은 느낌이라 원생들이 자주 먹었다고 한다.

진동씨는 오전에 학교를 갔다가 오후에 돌아와 밭과 염전 등을 오가며 강제노역을 했다. 밤이 되면 매질이 이어졌다. 원생 중 한 명이 잘못을 하면 원생 전원이 연대 책임을 져야 했다.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봐주는 경우는 없었다.

"기숙사에는 방장들이 있었는데, 걔네들한테 엄청나게 맞았어요. 낮에는 일을 하고, 밤이 되면 누구 한 명이 잘못했다는 이유로 단체로 맞고 기합을 받는 거예요. 곡괭이 자루 같은 걸로 때리고, 손가락 사이에 연필을 끼우게 한 다음에 잡고 돌리는 식으로 고문을 해요. 이거 엄청나게 아픈데, 그 어린 나이에 별의별 기합은 다 받아 봤어요."

초등학교 6학년의 나이가 됐을 무렵, 진동씨는 형과 함께 선감도를 빠져나왔다. 형제는 당시 선감학원에서 부천의 한 고아원으로 보내졌다. 집으로 돌아가진 못했지만, 형제는 노역과 매질이 없는 고아원에서의 생활에 만족했다.

"선감학원에서 갑자기 육지로 나가라는 거예요. 그 당시 저는 어렸기 때문에 '갑자기 왜 우리를 내보내주는 거지'라는 그런 생각만 했어요. 선감도에서 나올 수 있던 이유도 최근에 알게 됐어요. 축산부에서 일하던 형이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했나 봐요. 그 모습을 본 축산부 선생이 우리 형제 만큼은 책임지고 내보내 줄테니 나쁜 생각하지 말라고 형한테 이야기 했었대요. 얼마나 힘들었으면 열 몇 살 밖에 안 된 형이 죽으려고 그랬겠어요."

고아원에서의 생활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진동씨는 스웨덴의 한 가정으로 입양될 예정이었고, 이 소식을 접한 진성씨가 고아원에서 도망쳐 나갔다. 자신이 옆에 있으면 동생이 입양을 가지 않겠다고 떼를 쓸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형과 떨어져 살 수 없다고 생각한 진동씨도 고아원을 몰래 도망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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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 6학년 나이에 빠져나와 고아원 이동
"국가의 낙인 부랑아 꼬리표 떼려 살아와

무작정 나오긴 했는데, 주변에 도움울 줄 사람이 있을 리 만무했다. 진동씨는 고아원에 찾아와 봉사활동을 했던 대학생 형·누나들을 떠올리며 인천의 한 대학교로 향했다. 학교 근처에서 이틀밤을 지낸 진동씨는 그곳에서 운명처럼 형과 재회했다.

그때부터 형제는 진짜 부랑아가 됐다. 남의 집에 찾아가 밥을 빌어먹고, 청과물 시장 상인들이 버린 썩은 과일도 주워먹었다. 구두를 닦고, 껌을 팔며 돈을 벌었다. 먹고 살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닥치는 대로 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목숨을 부지할 도리가 없었다.

"저는 선감도에 갔다 오고 부랑아가 됐지, 그 전에 부랑아는 아니었어요. 갔다 오고 나서도 물론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부랑아였지만, 저는 그 어린 나이에 살아 보겠다고 도둑질하고, 사기치는 것 빼놓고는 정말 별의별 일은 다 했어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살 수도 없었고요."

30대로 접어든 1990년대가 돼서야 진동씨는 인천시에 정착해 예전보다 안정적인 생활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이후 그의 인생은 '부랑아'라는 꼬리표를 떼어내기 위한 여정이었다. 남들에게 책 잡히지 않고, 완벽한 것처럼 보이게끔 살아가려고 부단히 애썼다.

아내에게 선감학원에서 겪은 일을 속시원히 털어놓은 시점도 불과 7개월 전쯤이다.

"다른 사람들은 제가 이런 얘기를 하면 믿지도 않아요. 우리 집사람도 안 믿어요. 이해를 못하더라고요. 제가 그렇게 살아왔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는 거예요. 어떤 분은 저한테 '고생 하나도 안 하고 산 사람 같이 보인다'고 말해요. 근데 제가 그렇게 살려고 아등바등 발버둥 쳤던 것 같아요. 정말 처절하게 살았거든요. 외적으로는 강한 사람처럼 보이지만, 정작 속은 썩어 문드러진 거죠."

설령 부랑아여도 때리고 일 시킨건 잘못

진동씨는 원래 인터뷰에 응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는 과거를 떠올리며 계속 우는 모습밖에 보여주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문득 이야기가 하고 싶어졌다. 누군가에게 얘기라도 하면 지금 자신이 겪고 있는 고통이 조금이라도 치유되지 않을까 싶었다.

"우리가 사회로부터 격리될 대상이 아니라 국가가 저지른 폭력의 피해자였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알려졌으면 좋겠어요. 물론 당시 선감학원에 수용된 원생 중에 진짜 부랑아가 있을 수 있어요. 혹여 부랑아라 하더라도, 어린 아이들을 강제로 일 시키고, 때린 건 잘못된 거잖아요. 거기 있었던 시간만큼은 모두가 피해자죠."

진동씨는 선감학원에 대한 진상이 낱낱이 밝혀져, 그곳에서의 기억을 다른 사람과 거리낌 없이 이야기할 수 있는 날이 오길 바랐다. 그는 자신이 재직하고 있는 기업체 대표에게 용서를 구하고 싶다고 했다.

"회장님 차량을 운전하는 일을 하고 있어요. 올해가 정년이지만, 제가 그만두고 싶을 때까지 일을 하라며 배려해준 분이에요. 그분께 거짓말을 했어요. 선감학원을 나와 고등학교까지 검정고시를 통과한 걸 고등학교를 졸업했다고요. 책 잡히지 않고, 일을 하기 위해 한 거짓말이지만 살면서 가장 후회스러운 것 중에 하나예요. 언젠가는 제 잘못에 대해 용서를 구할 날도 오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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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선감학원 숙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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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보니 캄캄한 현실 속… 탈출은 없었다

04

5년이 바꾼 59년,
수명씨 이야기

우울, 고독, 생활고'.
하수명씨의 쉰 아홉 인생을 압축하면 온갖 부정의 단어들로 얼룩진다. 수명씨에겐 지우고 싶지만 지울 수 없고, 잊고 싶지만 잊을 수 없는 '5년'이 있다. 11살에 부산 형제복지원에 수용됐다 전원돼 13살에 안산 선감학원에 수용됐던 그 5년이다.

5년은 59년 삶을 우울에 시달리게 만들었고 평생 외톨이로 고독하게 했으며, 생활고를 겪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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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 없이 사람 잡아간
책임자들은 꼭 대가 치르게 해야

5년이 바꾼 59년, 수명씨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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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복지원과 선감학원에 수감된 기억들에서 좀 벗어나야 하는데, 그 생각들이 자꾸만 머릿속에 맴돌아요. 그때 감정과 생각에 사로잡혀있으니 밝은 생각을 하기 힘들고요. 거기에서부터 내 인생 모든 게 이렇게 (잘못)됐다는 생각도 많이 듭니다."

수명씨는 그저 '남에게 민폐 안 끼치고 깨끗이 죽는 것'이 남은 인생의 계획이라고 말했다. 두 곳에서 있었던 기억이 떠오르는 매 순간 그의 자존감은 바닥으로 떨어졌다. 오랜 시간 기억의 고통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면서 이제는 헤어나오기 힘들 수준의 우울증을 겪고 있다. 가족도 없고, 왕래하는 친구도 없이 홀로 살아온 수명씨는 '당장 먹고 살기 위해' 일감을 찾아다니는 게 인생의 전부다.
 

"선감학원 탈출하고 3일 동안 동인천역에서 먹을 거 하나 없이 노숙했어요. 일할 곳이 없어 전전긍긍하다 한 식당에서 절 받아줬고 20년 동안 그 식당에서 일했죠. 식당에서 더 일할 수 없게 되자 기술이나 교육이 필요 없는 일거리를 찾아 서울, 성남, 충청남도 등 전국 방방곡곡을 다녔어요. 그렇게 막노동만 5년정도 하다 지금은 구두닦이로 20년째 하고 있습니다."

수명씨는 형제복지원과 선감학원에 있으면서 제대로 배우고 성장하지 못했다. 선감학원을 탈출한 후에도 교육을 받지 못했고 국가, 지자체의 보살핌을 받지도 못했다. 수명씨는 주민등록증도 만들지 못한 채 쉰살이 넘도록 살았다. 취업을 하고 싶어 주민등록증을 만들려 행정기관을 찾아도 번번이 '퇴짜'를 맞았다. 평생 국가는 수명씨를 외면했다. 그는 '유령'으로 살아야만 했다. "일을 하고 싶어도 주민등록증이 없으니 아무도 절 받아주지 않았어요. 몇 번을 (행정) 기관에 가서 만들어 달라 해도 이유도 제대로 설명 안 해주고 서류가 부족하다면서 무시당했죠. 그러다 보니 누굴 만나도 자신이 없고 결혼도 못하고 가족도 만들지 못했죠. 주민등록증 하나만 있었으면 했어요."

겨우 5년 전에야 충남 아산시청 직원의 도움으로 겨우 주민등록증을 만들었다. 기초생활수급비도 받을 수 있게 됐다. 국가가 망가트린 인생, 조금만 더 일찍 손을 내밀었다면. 내년이면 벌써 예순이다. 지금 그에게 남겨진 건 혹독했던 지난 인생으로 지칠 대로 지치고 악화된 심신뿐이다.

공장 할당량 맞추지 못할 때 '매질'

하수명(59)씨가 기억하는 형제복지원과 선감학원, 두 부랑아 수용시설은 어떤 곳일까. 그는 망설임 없이 '죽을 때까지 맞는 곳'이라 표현했다. 죽을 때까지 맞아야 했던 그 곳에서 수명씨 나이는 고작 10~14살 무렵. 선감학원서 나온 지 50년 가까이가 지났지만, 지금도 그 처참한 기억은 너무나 구체적이고 또렷하다. 


"부산 형제복지원에서는 정말로 죽다 살아났어요. 매일 낚시공장에 투입됐는데, 30분마다 직원이 작업량을 확인하러 다녔어요. 30분간 10개를 만들라 했는데, 10개를 못 채우면 못 채운 숫자대로 손바닥을 맞았어요. 제가 작업량을 계속 못 채우니까 직원이 손바닥을 있는 힘껏 때리는데, 본능적으로 손을 피했어요. 그러니까 몽둥이로 머리랑 몸을 사정없이 두들겨 팼어요. 몸이 조그마하니까 이쪽으로 던지고 저쪽으로 던지고 그랬죠. 계속 맞다가 '그냥 날 죽이라고' 생각이 들 때쯤 기절했고 그제야 매질이 끝났어요. 일하다 쉴 때도 하루에 수십 대씩 맞았어요. 지옥 그 자체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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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을 때까지 맞아야

되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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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니 꽁보리밥·반찬 재배 강제노역
멀쩡히 부모 있어도 수집에 끌려와

형제복지원에서 보낸 2년은 지옥이었다. 그러던 중 시설 수용 인원이 가득 차 수명씨는 전원이 결정됐는데, 그렇게 간 곳이 선감학원이었다. 선감학원도 폭력으로 얼룩지긴 마찬가지였다. 그의 말대로 '어렸을 때부터 눈칫밥만 먹고 자란' 그는 형제복지원에서 몸으로 겪은 경험으로 선감학원에선 직원들이 시키는 대로 했다. 순응해야만 죽지 않는다는 걸 저절로 깨달은 셈이다.

"선감학원은 기강 잡는 직원들이 있어요. 말을 잘 안 듣는 얘들은 걸리면 죽도록 맞는 거예요. 그래도 형제복지원처럼 밤낮 안 가리고 때리진 않았고 규칙이 있었어요. 저는 규칙에 따라 행동했어요. 근데 어느 날 '꼴통' 같이 생겼다는 이유로 맞았어요. 머리채를 잡고 '가만히 있어'라 하는데, 너무 아파서 '아아' 소리를 냈더니 바리캉으로 '꽝' 소리 나게 찍으며 때렸어요. 지금도 맞은 상처 부위는 머리털이 안 나요. 그래도 선감학원은 천국이라 생각했죠. 아무리 때리고 힘들어도 삼시 세끼는 주고 재워주니까."

삼시세끼라 해도 원생들이 주식으로 먹던 꽁보리밥과 반찬은 모두 선감학원 일대에서 원생들이 직접 재배해야 했고, 매일 강제노역에 동원됐다.

"삼시 세끼 준다고 좋아했지만, 먹는 음식은 우리가 직접 길러서 먹었어요. 하루 3시간씩 밭일을 했거든요. 김치, 양배추 같은 걸 주로 재배해 먹었어요. 일부 원생들은 소랑 돼지를 기르는 축사에 끌려가 일을 했는데, 정작 고기가 반찬으로 올라온 적은 거의 없었어요. 가끔 대통령 하사품으로 과자와 사탕이 내려와 그때 특별하게 단 걸 먹을 수 있어서 좋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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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상을

받아봐야

얼마나

​받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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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와줄 사람·신분증도 없어
이후의 삶도 '지옥이었다'

그는 '자유'를 찾아 선감학원을 탈출했다. 형제복지원보단 낫다고 말하는 그였지만, 폭력과 통제는 같았다. 매일 지옥이 펼쳐지고 있었다. 수명씨는 '사람답게' 살고 싶었다고 말했다.

"맞는 게 너무 힘들었어요. 그때 먼저 탈출한 원생이 다시 돌아와 도와줄 테니 같이 나가자 해서 인천으로 나가는 배에 몰래 들어가 탈출했어요. 그런데 (나와 보니) 막상 아는 사람, 도와줄 사람도 없고, 주민등록증도 없고…. 이후의 삶도 지옥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점점 어둡게만 살아갔죠."

수명씨가 형제복지원과 선감학원에 수용된 이유도 '부랑아' 같아 보여서였다. 정작 그는 부랑아가 아니었다. 멀쩡히 부모가 있었고 집도 유복한 편이었다. 새어머니의 구박에 집을 나와있던 시간이 많았고 그러던 찰나 부산 일대에서 대대적으로 진행된 부랑아 수집에 잡혀들어온 것이다.

그의 몸은 45년 전 선감도를 탈출했지만, 마음은 여전히 그때의 기억에 얽매여 자유를 찾지 못했다. 수명씨는 이유 없이 자신을 가두었고, 인권을 짓밟은 '책임자'들을 처벌하는 것, 그리고 국가가 책임지고 사과하며 피해를 보상하는 것이 생애 마지막 소원이라고 분명하게 말했다.

"보상을 받아봐야 제가 얼마나 받겠나 라는 생각은 들어요. 그러나 나 말고도 이유 없이 사람들을 잡아간 형제복지원과 선감학원 담당자들, 책임자들은 꼭 대가를 치르게 해줬으면 좋겠어요. 그래야 우리의 한이 좀 풀리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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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자들에게 얼마 남지 않은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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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감학원 피해자
故 이대준씨 이야기

아들은 아버지가 늘 가엾고 안쓰러웠다. 뒤엉켜버린 삶의 실타래를 끝끝내 풀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아버지였다. 행복보다 불행, 기쁨보다 슬픔이란 단어와 더 가까운 존재였다. 아들의 눈에 비친 고(故) 이대준씨는 한평생을 벼랑 끝에 서서,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며 살았다. 선감학원은 대준씨의 일생을 지독하리만큼 꼬이게 만든, 그를 죽음의 문턱으로 내몬 비극의 시작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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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쫓기듯 급히 밥을 드셨죠
아버지의 아픈 습관

선감학원 피해자 故 이대준씨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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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생인 대준씨는 아홉 살 나이에 길거리에서 걸식을 한다는 이유로 단속반에 검거돼 선감학원으로 끌려갔다. 가족이 있는 아이들도 무작위 수집돼 선감도에 격리되는 판국에, 부모가 없던 대준씨는 단속반의 실적을 채울 좋은 먹잇감이었다.

그러나 대준씨는 선감도로 보내지기 전까지 수원시의 한 고아원에서 무탈히 생활하고 있었다. 부랑아가 아니었던 것이다.

진실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바깥에서 부랑아로 살았든, 그렇지 않았든 선감도에 수용된 원아들은 모두가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았다.

 

대준씨도 노역에 시달리고, 굶주렸다. 때가 되면 매를 맞고 기합을 받았다. 대준씨는 그렇게 10년 가량을 선감도에서 보냈다. 친구들과 함께 목숨을 걸고 탈출한 끝에 지옥 같던 섬 생활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었다.

그로부터 40여년이란 세월이 지난 지금, 당시의 고통스런 경험을 생생하게 증언해 줄 대준씨는 이 세상에 없다. 간암 투병을 하던 그는 지난 2020년 61살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국가폭력의 피해자가 가해자인 국가로부터 제대로 된 사과와 보상조차 받지 못한 채 숨졌다. 눈을 감던 그날까지 대준씨가 가슴 속에 품고 있던 응어리는 풀리지 못했다.

아들 현진(35)씨는 그런 아버지의 삶에서 애통함을 느낀다. 그에게 대준씨는 친구 같은 아버지였다. 서로 장난도 치고 별거 아닌 일로 다투기도 하는 평범한 부자였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농담처럼 선감학원 이야기를 꺼내곤 했다.

"제가 어렸을 때 반찬 투정을 하면 아빠는 선감도 이야기를 해주셨어요. 지금 살고 있는 환경에 감사해야 한다고 농담처럼요. 자신이 고아였고, 선감도에서 도망친 이야기를 아빠가 했던 기억이 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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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전 세상 떠난 故 이대준씨 아들
자라면서 부친의 비극적 경험 들어

현진씨는 자라면서 아버지의 고통스런 경험을 상세하게 알게 됐다. 아버지의 왼쪽 허벅지에 난 흉터가 곡괭이로 매를 맞다 날에 찍혀 생겼다는 사실도, 아버지의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습관도 그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선감학원에서는 밥 먹을 시간을 안 줬대요. 선착순 안에 들지 못하면 그날은 하루 종일 굶는 거라고, 주머니에 생쌀을 숨겨놓고 나중에 몰래 먹은 굶주린 기억을 많이 이야기해주셨어요. 그래서 그런지 아버지는 식사를 굉장히 빨리 했어요. 자장면 먹는 데 1분도 채 안 걸려요. 집에선 항상 모든 반찬을 밥에 넣고 비벼드셨어요. 급하게 먹으면 몸에 좋지 않으니까 그러지 말라고 해도 밥먹는 속도만큼은 안 변하더라고요."

0대 초반이던 대준씨는 간경화를 앓아 시한부 판정을 받은 적이 있을 정도로 간이 좋지 않았다. 아들의 눈에 아버지는 언제나 피곤해 보였다. 그래도 대준씨는 쉴 수 없었다.

그가 일을 멈추면 아들과 딸, 세 가족의 생계를 책임질 사람이 없었다. 막노동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현진씨 기억에 아버지는 평일·주말 구분 없이 돈을 벌러 나갔다.

대준씨는 2017년 간암 진단을 받고 투병 생활을 시작했다. 역시나 일은 멈출 수 없었다. 그는 병세가 악화돼 사망하기 1주일 전까지 인천시에서 시내버스 기사로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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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모르던 나이에 끌려와
삶이 너무 불행하게 흘러가

대준씨는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도 선감학원의 참혹한 진상을 알리는 일을 손에서 놓지 못했다.

그는 암판정을 받은 그해 선감학원 아동피해대책협의회 부회장으로 활동하며 선감도에서 벌어진 국가폭력의 민낯을 고발하는 데 누구보다 앞장섰다.

그는 자신의 치부를 자식에게 드러내는 것조차 꺼리지 않았다. 대준씨의 결의가 느껴지는 대목이다.

"선감학원 피해 사례가 공론화되던 시점에 아빠가 저한테 해주신 말씀이 있어요. 성인이 됐으니 저도 알아야 되겠구나 라는 생각으로 말씀해 주신 것 같아요. 선감학원에 계실 때 성폭행을 당했다는 이야기였어요.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 아이를 군대보다 더한 곳에 끌고 가 밥도 안 먹이고, 옷도 입히지 않고, 잠도 못자게 한 국가에 화가 나더라고요."

이후 아버지와 함께 선감도를 찾는 일이 잦아졌다. 가족여행을 가는 대신 시간이 나면 선감도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현진씨도 아버지와의 동행이 싫지 않았다. 그저 아버지 옆에 있어주고 싶었다.

"아빠가 선감학원 활동을 시작하면서부터 선감도에 자주 모셔다 드렸어요. 쉬는 날에 어디가고 싶냐고 물어보면 꼭 선감도에 가고 싶다고 하셨어요. 원생 다수가 헤엄쳐 탈출하다 죽은 곳이 어딘지, 선감도로 들어가는 배를 탔던 선착장이 어디였는지 그때 알게 됐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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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이대준씨가 생전 자필로 남긴 글

암판정 받고도 국가폭력 고발 앞장
생전 자필로 "트라우마…" 글 남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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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준씨가 가진 열정과는 반대로 그의 몸은 점점 병들어 갔다. 현진씨는 생전에 아버지가 무엇을 좋아했는지 잘 알지 못했다. 아침에 일을 나갔다가 돌아온 아버지는 주로 TV를 보며 저녁 시간을 보냈다. 술도 그리 좋아하지 않았고, 변변한 취미 하나 없었다. 대준씨는 그런 아버지가 가여웠다.

"아빠의 삶 자체가 슬픈 것 같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제대로 된 행복, 빛 한 번 보지 못한 채 살아오셨거든요. 어렸을 땐 부모가 없었고, 세상이 뭔지도 모르던 나이에 선감학원에 끌려갔죠. 그곳을 탈출한 뒤엔 배운 게 없으니 몸이 고생을 했고요. 원했던 삶, 일반적인 삶을 누려보지도 못하고 암이라는 사망 선고를 받은 아빠의 삶이 너무 불행하게 흘러갔다는 생각이 들어 안쓰러워요."

아버지가 선감학원에 끌려가지 않았다면, 정상적인 교육을 받고 기술을 익혀 삶을 살았다면. 그랬다면 아버지가 병들어 돌아가시는 일은 없지 않았을까.  
요즘 현진씨는 아버지의 정반대 삶을 그려본다.

"선감학원에서 탈출한 어린 시절의 아버지를 만날 기회가 있다면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어요. 제가 세상에 태어나지 않아도 괜찮으니까 아버지가 살고 싶은 대로 마음껏 삶을 살아보라고요."

 

선감학원 피해자 대준씨는 2020년 1월15일 고인이 됐다.
 

그는 병상에 누워서도 선감학원 일을 처리하고자 매일 수십통의 전화를 했다고 한다. 그가 생전 자필로 남긴 글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선감학원 생존자들의 아픈 기억'의 일부를 남긴다. "선감학원에서 지내다 세상 밖으로 나온 소년들은 숨어 살며 선감도에서 고통받던 기억들을 잊으려고 마셔보지도 못한 술을 조금씩 마시다 술 중독이 되어 한명 한명 세상을 떠나갔습니다. 지금이라도 국가와 경기도는 선감학원 피해 생존자들이나 억울하게 죽어간 소년들에게 진심으로 사죄하길 바랍니다. 많은 피해 생존자들은 나이도 많이 들었고, 병에 걸려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데 언제까지 과거사 과거사 말만 하고들 계십니까. 인생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지금이라도

국가와

경기도는

진심으로

사죄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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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빠진 경기도 지원의 한계

상처만 주는 '피해자 반쪽 지원'

국가는 어디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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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연 경기도지사가 선감학원 피해자에게 공식 사과를 한 얼마 후 진성(62·가명)씨 는 전화 한통을 받았다. 진성씨와 함께 선감학원에 수용됐던 피해자 경환(가명)씨였다.


경환씨는 대뜸 이렇게 말했다. "진성아, 혹시 주소지를 너네 집으로 옮겨놓을 수 있을까?" 전화를 사이에 두고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진성씨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알거든요. 원래 경환이는 여기 같이 살다가 광주광역시로 이사를 갔어요. 근데 경기도가 피해자 지원을 한다면서 경기도 거주자만 하겠다고 하니. 이게 올바른가요?"

진성씨와 경환씨 모두 국가가 용인하고 경기도가 운영한 '선감학원' 피해자였다. 60년도 더 지나 겨우 경기도지사의 공식적인 사과를 받았고 마음 속 응어리가 조금 풀리나 했는데, 경기도민인 진성씨는 지원받을 수 있고, 광주광역시에 사는 경환씨는 받을 수 없다.


"나라에서 사과를 해야 합니다. 하지만 인권유린을 실행한 경기도가 책임을 져야 하는 것도 맞아요. 김 지사가 눈물 흘리고 사과한 것이 진심어린 모습이었다면 경기도민으로만 국한하지 않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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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연 지사 사과·생활지원 약속
예산 등 한계로 도내 거주자 한정

비단 이들만의 사정이 아니다. 우리가 만난 진성씨 동생 진동(가명)씨, 하수명씨 등 피해자 대부분과 유가족 모두 마찬가지 마음이다. 특히 이들과 관련된 지원과 보상의 문제는 현재의 삶과도 직결된다. 

 

선감학원 피해자들은 정신적, 신체적, 인지적 힘을 기르는 성장기를 선감학원에서 보냈다. 보통의 아이들이 정규교육을 이수하고 운동장을 뛰어놀며 사회 속에서 건강하게 살아가는 방법을 배울 때, 이들은 학교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했고 어른도 감당하기 힘든 강제노동과 가혹행위에 시달렸다.


그 기억이 영구적 상처로 남아 대인관계 형성 등 사회를 살아 나가는데 큰 어려움을 겪게 되고 고립감, 불안감 등 만성적인 트라우마를 겪게 된다고 전문가들이 입을 모은다.

경기도는 선감학원 피해자 지원 종합계획을 내년부터 시행하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경기도에 거주하는 피해자만 의료비와 생활지원금을 지원하겠다고 밝혀 피해자들의 반대가 커지고 있다.

경기도 역시 할 말은 있다. 모두 지원을 하고 싶지만, 예산과 지원 규모에 한계가 있어 경기도가 사업을 총괄하긴 쉽지 않다는 것이다. 또 도는 선감학원 피해자 지원 조례를 마련해 2020년부터 작게나마 각종 지원사업을 진행하며 노력하고 있다고 항변했다.

"주소 옮길 수 있나…" 반대 직면10명중 6명은 역외…논란 커질듯

하지만 10명 중 6명이 경기도 밖에서 거주하는 현 상황에서 논란은 계속될 것이고, 피해자들의 상처는 더해질 것이다.

이렇게 진실규명과 피해지원이 더딘 이유는 이 모든 과정에 선감학원을 만들고, 경기도를 운영자로 명령한 '국가'가 빠져있기 때문이다.

이미 2010년부터 선감학원 피해지원 논의가 본격적으로 수면 위에 떠올라 2018년 국가인권위원회는 국회의장, 행정안전부 장관, 경기도지사에게 지원 방안 마련을 촉구했고 지난 10월 진화위도 진실규명과 함께 피해자 지원책 마련을 국가의 몫으로 권고했다.


여전히 선감학원 피해자들은 그날 속에 살고 있다. '혼자 길 위에 있다'는 이유로 아이를 잡아 가둔 국가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60년이 지나도 계속되는

​피해자의 트라우마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이하 진화위)는 진실규명에 앞서 선감학원 아동인권 침해사건 신청인 중 99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해당 사건 피해자들에 대한 사회경제, 심리적 트라우마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피해자 대부분이 신체적, 정신적 고통을 호소했다.

출처 :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

선감학원 관련 피해자들이 겪는 정신적 고통(중복응답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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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불안 고통의 나날
치유 사업은 2020년 사실상 멈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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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부진했던
경기도 지원정책,
정부 지원도

경기도는 2020년 4월부터 선감학원 사건 피해자 신고센터 운영을 시작했다. 이후 선감역사박물관이 문을 열었고 경기연구원에서 선감학원 사건 피해 사례 조사 분석 보고서도 냈고 피해자 지원도 시작됐다.

의료 지원은 취약계층 의료비 지원사업 중 일부 예산으로 이뤄지는데, 1인당 연 500만원을 지원하고 2020년부터 올해 9월까지 378명이 지원을 받았다. 하지만 경기도의료원 6개 병원에서만 받을 수 있다.

경기도에 거주하지 않는다면, 하루를 꼬박 잡아 경기도의료원을 찾아야 한다. 피해자 대부분이 상대적으로 소득이 낮아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워 의료지원이 절실하지만 일을 하고 있어 사실상 경기도 외 거주자라면 지원을 받기 어렵다.

경기도에 거주하고 있어도 생계를 위해 일을 하기 때문에 의료원을 찾는 일은 쉽지 않다. 경기도에 거주하는 진동씨는 의료지원 받는 걸 포기했다. 시간이 없어서다. 그는 할 수 있다면 가까운 동네 병·의원에서도 지원받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트라우마 치료를 위한 정서안정지원사업은 사실상 2020년 이후 멈춰 있다. 2020년에 시범사업으로 추진됐는데, 찾아가는 상담실 지원을 받은 이들은 10명 내외에 불과해서다. 2천만원도 채 되지 않는 예산으론 실질적 지원이 어렵다는 게 경기도의 설명이다. 이 때문에 지난해는 정서안정 동영상 제작으로 사업이 변경됐다.

동영상 4편을 만들어 피해자들이 볼 수 있도록 한 것인데, 만성적인 트라우마를 겪는 피해자들의 치유에 효과가 있을지는 의문이다. 경기도는 내년도 본예산에 14억을 대폭 확대 편성했다. 이마저도 지원 조건이 경기도 거주로 한정되는 등 한계점이 드러나며 논란이 크다.

선감학원을 위한 경기도 지원사업에 국비가 지원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그나마 최근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이 국회 행정안전위원회의 행정안전부 국정감사에서 선감학원 지원 계획을 검토하겠다고 했지만, 한 달이 지나도록 감감무소식이다.

이를 두고 행안부는 "내부적으로 검토는 하고 있지만, 선감학원 사건은 행정안전부뿐만 아니라 법무부 등 여러 정부 부처에 연관돼있어 일단 진화위의 권고문을 기다리고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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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감학원 아동 인권침해 사건 진실규명 결정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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